정부가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33년 만에 감축한 후 대학·연구소·기업 등 연구 현장에 후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에 따라 젊은 연구자와 기초과학계에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게 하고 주요 5개국(G5) 과학기술 강국 도약을 위한 비효율 제거 및 혁신 생태계 구축을 하려면 국회 예산 심의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R&D 예산 카르텔 타파(국민의힘)’냐, ‘깜깜이로 난도질된 R&D 예산의 원상회복(더불어민주당)’이냐를 넘어 구조 개혁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초 정부는 내년 정부 R&D 예산을 5%가량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다가 감축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이에 따라 내년 R&D 예산은 올해(30조 700억 원)보다 16%가량 감소한 25조 9000억 원이 됐다. 교육·기타 R&D 예산이 일반 재정 사업으로 재분류됐다고 치더라도 삭감률이 10%를 훌쩍 넘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6월 말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수준의 공동 연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R&D 분야를 카르텔로 지목한 데 따른 것이다.
R&D 예산 감축 이후 대학가에서는 기초과학 생태계 위축과 함께 젊은 층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가뜩이나 의대 편중이 심한 상황에서 이공계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학생 인건비 총액과 지급 대상이 감소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이정문 의원에 따르면 학생 인건비를 통합 관리하는 교육기관 62곳의 올 8월~내년 2월 학생 인건비 예상 지급액과 지급 대상이 올 1~8월보다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월평균 학생연구원 인건비 지급액의 경우 학사 77억 9000만 원에서 69억 8000만 원으로 10.4%, 석사 293억 원에서 278억 원으로 5%, 박사는 291억 원에서 278억 원으로 4.2% 각각 감소한다. 자연스레 지급 대상도 학사 1만 6171명에서 1만 4964명으로 7.5%, 석사 3만 2342명에서 3만 1416명으로 2.9%, 박사 2만 3836명에서 2만 3157명으로 2.8% 줄어든다.
젊은 연구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과제도 감소한다. 천승현 기초연구연합회 부회장(세종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기초연구 사업 중 신진 연구자와 비전임 교원을 지원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생애 기본 연구(기본 연구·생애 첫 연구)와 교육부의 학문 균형 발전 지원 사업은 내년 신규 과제를 받지 않는다. 현재 진행 중인 계속 과제도 대부분 10~40% 감액된다. 천 교수는 “학생과 박사후연구원도 내년이 어떻게 될지 불안해하는 상황”이라며 “3년 뒤에는 연구 지원을 받는 기초연구자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학·물리·화학·생물과학·지구과학 등 기초과학학회협의체 측은 “예산 삭감의 최대 피해자가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이라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여기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 등 4대 과학기술원에 대한 정부 출연금도 10%가량 감소한다. 이에 대해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회 과방위 국정감사에서 “연구 현장에서 우려하는 학생연구원 등의 인건비 문제는 연구와 학업에 지장이 없도록 해결할 것”이라고 답했다. 과기정통부는 젊은 과학자의 국내 정착을 위해 신진 연구자 연구실 조기 정착 지원, 우수 신진 연구, 한 우물 파기 기초연구 등도 32%가량 늘어난 약 3200억 원을 배정했다고 설명했다.
연구계의 사기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과기정통부 산하 25개 정부출연연구원의 주요 사업비 삭감 규모가 25%에 달하기 때문이다. 출연연에서는 R&D에 투입되는 출연금이 감소함으로써 연구자가 외부 연구 과제를 수주해 비용을 충당하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오히려 강화돼 단기 성과 위주 연구 문화가 심화할 것이라는 지적도 내놓는다. 과기정통부는 출연연 안팎에서 연수직과 비정규직 총 7500여 명의 고용이 불안해정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자 출연연의 연구개발 적립금 등 자체 재원으로 충당하겠다고 했으나 ‘하석상대’라는 지적도 나온다. 출연연의 비정규직은 1300여 명, 학생연구원은 3,600여 명, 박사후연구원은 1,400여 명이다.
벤처·스타트업들도 R&D 예산 감축으로 인해 시름이 깊다. 한 바이오 벤처의 대표는 “주변 벤처·스타트업을 보면 10~20%는 이미 망했고 현재 도산 위기에 처한 곳도 많다”며 “그런데도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지원이 주춤하고 내년 R&D 예산도 큰 폭으로 감축될 예정이라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벤처 대표는 “현재 진행 중인 연구 과제의 지원금 지급이 뒤로 미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정부가 내년에 첨단산업단지 7곳에 지원하는 인프라 예산이 포항(2차전지·154억 원) 한 곳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디나 페트라노비치 닐센 덴마크공대 교수는 최근 생물공학회 심포지엄에 참여해 “R&D는 비용이 아닌 투자”라며 “덴마크 역시 정부 R&D 예산이 해마다 줄고 있으나 노보노디스크 같은 기업 등 민간 영역에서 조성된 대규모 펀드가 R&D로 많이 유입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장관은 이날 국회 국정감사에서 “R&D 나눠먹기, 소액·단기 과제 뿌려주기, 주인이 있는 R&D 기획 등 R&D 예산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낡은 관행과 비효율을 걷어내고 최고 수준의 R&D, R&D다운 R&D를 수행하는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할 시기”라고 말했다. 그는 또 청년연구자들에 대해 “진심으로 그분들을 사랑하고 문제가 생기게 하고 싶지 않다”며 울컥한 심정을 피력했다. 그는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며 “진심으로 좋은 (R&D) 시스템을 줘 미래에 다른 나라와 경쟁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학생들이 걱정하는 그런 문제들이 없도록 최선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한편 정부가 선도·글로벌 연구 강화를 외치며 반대로 예산을 올해 5075억 원에서 내년 약 1조 8000억 원까지 늘린 국제 공동 R&D 분야에서는 갑자기 해외 파트너를 구하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조남준 난양공대 석학교수는 “한국에서 국제 공동 연구 어젠다와 방식, 활성화 방안을 치밀하게 짜야 한다”며 “자칫하면 세금 낭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