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거듭된 금리 동결에도 국제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것은 시장의 관심이 금리 고점 수준에서 고점 유지 기간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 대응 과정에서 가파르게 금리를 올렸으나 아직 물가가 목표 수준보다 높은 만큼 고금리를 당분간 유지할 가능성이 커졌다. 국내도 인구구조나 탈세계화·기후변화 등 구조적인 물가 상승 압력으로 과거와 같은 저물가·저금리로 복귀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고금리 장기화 국면에서 가장 크게 문제되는 것은 부채 리스크다. 올해 가파른 금리 인상 국면이 끝나면 내년부터 금리 인상 누적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고금리가 길어질수록 가계·기업의 상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리는 연차총회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이 ‘고금리 장기화’를 주요 의제 중 하나로 꼽은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토비아스 아드리안 IMF 통화자본시장국장은 블로그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통화 긴축의 결과로 부채 부담이 더 커졌다”며 “높은 금리로 차주의 취약성을 증폭시켜 채무불이행이 급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부채 리스크가 가장 큰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분기 기준 101.5%로 국제결제은행(BIS) 조사 대상 43개국 중 네 번째로 높다. 팬데믹 기간 중 부채 증가 속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빨랐다. 가계의 변동금리 대출 비중도 잔액 기준 70.8%로 높은 수준이다. 한은마저 “가계·기업 등 민간 부문의 부채가 성장과 금융안정을 저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누증됐다”고 지적할 정도다. 그런데도 올해 들어 가계·기업 부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팬데믹 기간 중 급격히 늘어난 부채가 고금리 장기화로 인해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며 “국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과 함께 가계·기업 부채 위험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미국 주도의 고금리 장기화 국면에서 우리는 정책적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 상황이 견조한 미국과 달리 우리는 경기가 어려워져도 금리를 내려 대응할 수 없다. 한미 금리 역전 폭이 사상 최대인 2.0%포인트에도 대규모 자금 유출이 없는 지금의 균형 상태를 한은이 먼저 움직여 깨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고금리 장기화로 부채 리스크가 터져 나와도 통화정책이 아닌 재정 정책이나 금융정책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지만 이마저도 여력이 충분치 않다.
고금리는 이미 경제·금융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금융 부채 보유 가구 소득에서 이자가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 1분기 3.8%에서 올해 2분기 5.7%로 증가했다. 가계 원리금 상환 부담이 늘어난 올해 2분기부터 민간소비 성장률은 전 분기보다 0.1% 감소하면서 부진에 빠진 상태다. 전체 대출 연체율도 낮은 수준이지만 지난해 1분기 0.56%에서 올해 2분기 0.86%로 빠르게 상승하는 추세다.
특히 대출 만기 구조가 짧은 자영업자나 기업을 중심으로 고금리로 인한 차환 리스크가 불거지고 있다. 자영업자 대출 연체액은 2분기 기준 7조 3000억 원으로 역대 최대다. 대법원에 따르면 올해 1~8월 법인 파산 신청 건수는 1034건으로 이미 지난해 연간 신청 건수(1004건)를 넘어섰다. 가계대출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택담보대출도 변동금리 비중이 큰 만큼 안심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국에서는 당분간 비은행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연체율이 높아지더라도 버틸 수밖에 없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은은 아직까지 물가를 우선해 통화정책을 운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물가가 목표 수준인 2%로 수렴하는 시기를 내년 말로 언급했다. 내년 하반기 이후 금리 인하 논의가 이뤄지더라도 완화적인 수준까지 급격히 금리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마저도 미 연준이 금리를 내릴 수 있다는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 윤석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는 내외 금리차 확대 부담 등을 감안해 연준의 정책 전환을 확인한 이후 후행적으로 단행할 것으로 전망된다”며 “금리 역전 이후 자금 유입 규모가 줄어들면서 선제적 인하에 부담을 느낄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