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황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중동 외교 전략이 격랑에 휘말리고 있다. 17일(현지 시간)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 내 병원이 폭발해 500여 명의 민간인이 숨지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서다. 이날 이스라엘을 전격 방문해 꼬인 중동 전략 실타래를 풀려던 바이든 대통령의 구상은 출발도 전에 난항을 겪게 됐다.
뉴욕타임스(NYT)와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가자지구 내 가자시티의 알아흘리아랍병원이 폭격을 받아 500여 명이 사망했다. 현재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린 부상자 등을 고려할 때 사망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 AP는 시신의 다수는 어린이라고 보도했다.
누구의 소행일까. 하마스가 통제하는 가자 보건부는 이스라엘의 공습이라고 발표했다. 반면 이스라엘방위군(IDF)은 팔레스타인의 무장 세력인 이슬라믹지하드의 소행이라고 분석했다. 이들이 로켓을 발사했다가 실패하면서 병원이 폭격됐다는 것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가자지구 병원을 공격한 것은 야만스러운 테러리스트들이지 우리 군이 아니다”라며 “그들은 우리 아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했고 자신들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살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슬라믹지하드 측은 “병원이 있는 지역에서 작전은 전혀 없었다”며 부인했다.
중동에서는 병원 폭격 책임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보는 분위기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이스라엘의 책임을 거론하며 “모든 국제법과 규범을 명백히 위반했다”고 말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주민들에 대한 집단적 처벌 정책을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스라엘 등 중동을 순방하려던 바이든 대통령의 구상도 차질을 빚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애초 18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도착해 네타냐후 총리와 회동한 뒤 요르단의 암만으로 날아갈 계획이었다. 이곳에서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을 비롯해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의 4자회담이 예정돼 있었다. 이 계획은 폭발로 인해 취소됐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은 “이번 폭발은 무시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전쟁범죄”라며 회의를 취소했다.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도 병원 폭발 소식을 듣고 요르단에서 서안지구로 돌아갔다.
바이든 대통령도 이에 요르단 경유를 취소했다. 애초 이스라엘 지지 방침을 강조하는 동시에 주변국 등의 협조를 이끌어내 확전 리스크를 차단하려는 구상이었지만 순방 효과는 옅어지게 됐다. 리처드 고완 국제위기그룹 유엔 국장은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방문의 목표는 미국이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이번 사건은 전쟁을 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오히려 바이든 대통령이 18일 네타냐후 총리를 만나 이스라엘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면서 지역 혼란은 더 커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앞서 이날 병원 폭발 이후 이라크 바그다드와 요르단 암만, 레바논 베이루트 등 중동 각지에서 반이스라엘 시위가 일어났다. 미 싱크탱크 중동연구소(MEI)의 랜다 슬림 선임연구원은 “여론이 매우 악화하고 사람들의 분노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와의 회담에 앞서 “내가 본 바로는 그것(병원 폭발)은 당신(네타냐후 총리)이 아닌 다른 쪽이 한 것처럼 보인다”고 언급해 이스라엘에 힘을 실어줬다. 이에 하마스는 “미국은 이스라엘에 맹목적으로 편향돼 있다”고 비난했다.
확전 우려도 커지고 있다. 17일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는 이스라엘을 향해 “팔레스타인인들을 겨눈 범죄와 관련해 심판받아야 한다”며 관여 가능성을 시사했다. 특히 그는 “미국도 이 범죄에 책임이 있다”고 겨냥했다.
미국 의회는 이번 전쟁에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이 개입할 경우 미군 파병을 승인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공화당 소속인 마이클 매콜 미 하원 외교위원장은 이날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필요한 경우에 대비해 법안 초안을 마련하고 있다”며 “이 법안을 표결에 부칠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중동 상황이 매일 악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동 상황이 악화할 경우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가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번 이스라엘 방문은 내년 대선 캠페인을 앞두고 주요 동맹국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헌신과 그의 외교 경험을 부각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병원 폭발로 인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