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이 소풍처럼 설레요”…종이가죽 만드는 '러블리페이퍼'

폐박스·쌀 포대·폐침구 새활용 '친고령' 기업
이산화탄소 9425kg, 물 19만 5000L 절감
폐지 매입·시니어 직원 고용으로 소득 보전
기우진 대표 "폐지수거인은 자원재생활동가"

기자가 사무실을 찾은 18일, 쌀 포대가 겹겹이 쌓인 사무실 복도 너머로 시니어들이 침구 시트와 쌀 포대 등을 오리고 붙이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이곳은 폐박스나 종이 쌀 포대, 버려진 호텔 침구 시트지를 새활용하는 친환경 기업 러블리페이퍼다. 총 10명의 직원 중 시니어가 6명인 ‘친고령’ 기업이기도 하다.



러블리페이퍼의 시니어 직원들이 침구 시트와 쌀 포대로 종이가죽을 만들고 있다. / 정예지 기자

‘종이’가죽이라고 쉽게 해어지거나 찢어지지는 않는다. 침구 시트로 안감을 덧붙이고 겉에는 방수코팅액을 도포해 인장력과 방수성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기우진(40) 러블리페이퍼 대표가 직접 2년 동안 사용한 노트북 가방을 꺼내 들었다. 사용감은 있었지만 오히려 자연스럽게 잡힌 주름과 흔적이 멋스러웠고, 찢기거나 상한 곳 없이 튼튼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시니어 직원들은 합을 맞춰 종이 가죽을 한 달 평균 2500장, 생산 물량이 많을 때는 5000장까지도 생산한다. 기 대표는 종이가죽 한 장 생산으로 폐지 쌀 포대 33g, 폐린넨 천 67g, 이산화탄소 0.725kg, 물 15L를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러블리페이퍼는 2021년부터 2023년 5월까지 쌀 포대 1만 3000포대를 종이가죽으로 재탄생시켰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이산화탄소 배출량 9425kg, 물 사용량 19만 5000L를 절감한 셈이다.



종이가죽으로 만든 러블리페이퍼의 노트북 가방. / 정예지 기자

러블리페이퍼는 ‘페이퍼 캔버스’도 제작한다. 대부분 어르신들인 폐지 수거인으로부터 고물상보다 약 6배 비싼 단가로 폐지를 매입한 후 작가들의 재능기부를 받아 캔버스를 작품으로 만들고, 수익의 일부로 다시 폐지 수거인들을 지원한다.


기 대표가 시니어 직원을 고용하고 폐지를 비싸게 매입하는 이유는 폐지 가격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폐지를 수거해 생계를 잇는 이들의 입장에선 가격 변동성이 커 안정적인 소득 보장이 어렵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난 2018년 중국이 폐기물 수입을 중단하자 국내에 폐기물이 넘쳐나 폐지 가격이 급락했다. 코로나19 등의 이유로 경기가 나빠지고 물동량이 줄었을 때도 폐지 재고량이 늘어 가격이 하락했다. 기 대표가 사업을 시작한 2017년만 해도 1kg당 130원이었던 폐지 가격은 최근 50원까지 떨어졌다. 6년 사이 폐지 매입 가격이 60%나 급락한 셈이다. 그럴 때면 폐지 수거인들은 더 많이 줍기 위해 더 오래 일할 수밖에 없다. 노동 환경은 열악해지고, 폭염과 혹한에 노출되는 등 건강권도 위협받는다.



폐지로 만든 ‘페이퍼 캔버스’.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폐지가 고흐의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에’를 담은 작품이 됐다. / 정예지 기자

폐지값을 후하게 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폐지 수거인을 빈곤과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환경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자원재생활동가’로 바라보고, 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취지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서 지난해 발표한 ‘폐지수집 노인 현황과 실태’를 보면 폐지 수거인들은 전국 단독주택 폐지 재활용 중 약 60.3%를 수거했다. 주택이 밀집한 골목가는 폐기물 혼합배출 등의 문제도 적지 않지만 폐지 수거인들 덕분에 우리나라 폐지 회수율이 세계 상위 수준이라는 기 대표의 설명이다. 2014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2007년 기준 미국과 프랑스 등 선진국의 폐지 회수율은 50%~60%로 집계됐지만 국내 폐지 회수율은 75.4%에 달했다. 2021년에는 회수율이 87.4%까지 올랐다.


하지만 종종 사람들은 미관상 흉하다는 이유로, 혹은 교통사고의 원인이라는 등의 이유로 이들을 얕잡아 보기 십상이다. “폐지 수거인은 하루에 100kg을 주우세요. 플로깅은 멋있고 쿨한 활동인데 폐지 수거인은 왜 그렇게 봐주시지 않을까요.” 폐지 1톤을 재활용하면 약 20년생 나무 20그루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는 만큼 폐지 수거인들의 ‘친환경 활동’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기 대표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리 정해 둔 폐지 가격의 하한선 이하로 떨어지면 차액을 보전해주는 사업, 손수레 지원, 교통 교육 등 지자체마다 ‘재활용품 수집인 지원에 관한 조례’가 있다. 그러나 기 대표가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2019년 7월, 이명수 의원이 폐지 수거 어르신을 환경보호·자원재활용 기여자로 인정한 ‘재활용품수거노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하는 등 법 개정에 진전이 있었으나 임의만료폐기됐다. 폐지를 줍는다는 이유로 더 지원하면 형평성에 어긋나고, 이중 복지 수혜의 문제가 있다는 이유였다. 쓰레기를 줍지 않던 노년층이 복지 혜택을 위해 폐기물을 줍게 된다는 ‘풍선효과(한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불거지는 것)’의 가능성 등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기우진 러블리페이퍼 대표 / 정예지 기자

러블리페이퍼는 폐지 수거인들을 향한 인식 개선과 법 개정을 위해 스피커 역할도 도맡았다. 다음 달 폐지 수거인 관련 기업과 연구자를 초대해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영국의 비영리조직 ‘WIEGO’는 고물 수집가(Junk collector)에서 폐기물 수거인(Waste pickers)으로 명칭을 순화하고, 3월 1일을 세계 폐기물 수거인의 날로 만들었다. 러블리페이퍼도 이들처럼 자원재생활동가라는 명칭이 널리 자리 잡도록 인식개선운동을 하고, 시니어들의 ‘정고픔’을 해결할 수 있도록 연대해 나갈 예정이다. 러블리페이퍼의 목표는 설립 이래 단 하나다. ‘멋지게 망하는 것’.


“창업 이후 제일 기뻤을 때가 2019년 시니어 직원 분을 처음 고용했을 때였어요.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거니까요. 한 분은 매일 소풍 오는 것처럼 설렌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게 미션은 아니에요. 러블리페이퍼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만큼 복지에 빈틈이 없는 세상을 그릴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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