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초대형 투자은행(IB) 증권사들이 올 들어 발행어음을 통해 4조 원 넘는 자금을 확보하고도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774억 원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투자 업계와 정치권은 초대형 IB 증권사들이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라는 취지에서 정부의 인가를 받고 어음을 발행하게 됐지만 ‘모험자본’ 공급 역할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경제신문이 26일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증권사 발행어음 조달 및 투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국내 초대형 IB들은 올 들어 9월 말까지 발행어음으로 4조 619억 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발행어음 사업 인가를 받은 초대형 IB는 자기자본 4조 원 이상인 미래에셋·NH투자·한국투자·KB증권 등 4개사다.
초대형 IB 증권사들은 어음 발행으로 조달한 자금 중 90.9%인 3조 6910억 원을 대기업·중견기업에 대출 방식으로 투자했다. 미래에셋증권(006800)은 8686억 원, KB증권은 1조 3635억 원, NH투자증권(005940)은 909억 원, 한국투자증권은 1조 3680억 원을 각각 대기업·중견기업에 투입했다. 미래에셋은 특히 대기업 대출(9257억 원)에 집중하면서 중견기업을 571억 원 줄였고 KB증권도 대기업에 1조 2923억 원의 투자를 몰아줬다.
반면 초대형 IB 4개사가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에 투자한 금액은 774억 원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증권사들이 발행어음으로 올해 조달한 자금의 1.9%에 그친다. 4개 증권사들이 발행어음 인가를 받은 후 올 해 9월 말까지 어음을 발행해 확보한 자금은 34조 4049억 원에 이르는데 벤처·스타트업에 대출한 돈도 4023억 원에 불과했다.
특히 벤처 기업만 놓고 보면 지원 자금이 올 들어 지난해보다 124억 원 줄었다. 증권사별로 보면 NH와 KB, 한투 등은 벤처 기업 투자액을 지난해보다 각각 76억 원, 36억 원, 12억 원씩 줄였다. 미래에셋증권은 올해 발행어음으로 9932억 원을 새로 조달했는데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벤처 기업 투자가 전무했다.
초대형 IB 4개사의 스타트업 투자액 합계는 지난해보다 898억 원 늘어나긴 했지만 NH투자증권은 스타트업에 아예 투자를 하지 않았다. 올해 발행어음으로 3조 2480억 원을 조달한 한투 역시 스타트업 투자를 외면하고 돈을 다른 투자처들에만 썼다. 미래에셋증권은 스타트업에 올 해 신규 조달액의 3.0%인 300억 원만 더 투자했다. KB증권의 경우 2019년 5월 발행어음 사업 인가를 받고 올해 처음 598억 원을 투자했다. 이는 KB증권이 올해 발행어음으로 신규 조달한 1조 380억 원의 5.76%다.
발행어음은 증권사가 자체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하는 만기 1년 이내의 단기금융 상품이다. 앞서 정부는 2016년 8월 모험자본 활성화를 목적으로 기존에는 은행만 할 수 있던 어음 발행을 자기자본 4조 원 이상 초대형 IB 증권사들에도 허용했다. 이에 따라 발행어음 인가를 받은 증권사 4곳은 자기자본의 200%까지 단기어음을 발행해 기업에 대출 등으로 투자할 수 있게 됐다. 증권사 발행어음은 은행과 달리 투자 요건이 까다롭지 않은 강점도 있다.
문제는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을 투자할 기업 규모에 대해 구체적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고객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돌려줘야 하는 IB 입장에서는 투자금 회수가 불확실한 스타트업·벤처 기업보다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에 투자를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현 제도는 초대형 IB 증권사들이 발행어음 조달 자금의 50%를 기업금융 관련 자산에 투자하고 부동산금융에는 30%까지 돈을 넣을 수 있다는 정도만 규정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초대형 IB 증권사들의 발행어음 사업이 벤처·스타트업을 상대로 자본 공급 창구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만큼 당초 제도 도입 취지를 거의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투자 대상과 관련한 구체적 가이드라인이 없는 데다 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벤처·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비중이 지나치게 적기 때문이다.
윤 의원은 “초대형 IB들에 어음 발행을 허용한 데는 스타트업과 벤처 기업에 대한 투자 확대 목적의 이유가 컸지만 실적은 대단히 미흡한 상황”이라며 “IB 발행어음이 자금 공급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벤처·스타트업 지원 실적에 비례해 한도를 늘려주는 등의 제도 개선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제도의 취지를 살리려면 기업금융 내에서도 중소 벤처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 투자해야 한다는 식의 구체적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