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및 유통 업계에 ‘가성비’가 아닌 ‘가잼비’의 유행이 거세다. 상품의 이름을 길게 늘이거나, 크기를 대폭 키우는 등 이색적인 재미를 곁들인 제품이 인기를 끌면서다.
버거킹은 지난 4월 상품 이름만 무려 ‘서른아홉자’인 버거를 선보였다. 제품의 정식 명칭은 ‘콰트로 멕시멈 미트 포커스드 어메이징 얼티밋 그릴드 패티 오브 더 비기스트 포 슈퍼 미트 프릭’으로, 소고기 패티가 3장 들어간 ‘콰트로 맥시멈 3’과 ‘콰트로 맥시멈 4’ 두 가지 옵션으로 출시됐다. 너무 긴 이름 탓에 매장에서는 ‘콰트로 맥시멈…이하 생략’이라는 제품명으로 표현됐다.
롯데웰푸드는 지난 8월 기존 초코파이 크기를 키운 ‘빅 사이즈 초코파이’를 선보였다. 초코파이 개당 중량은 40g으로 증량했으며, 마시멜로 함량도 12%나 늘렸다. 뒤이어 GS25는 1.2m, 중량 4kg에 달하는 초대형 크기의 ‘넷플릭스 인간팝콘’을 이벤트성으로 한정 출시했다. 뒤이어 CU에서는 대용량 약과인 ‘이웃집 통통이 대형 약과 쿠키가 출시되면서 식품 유통 업계에서 ‘거거익선’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해당 상품들은 모두 ‘잘파세대’를 겨냥한 것이다. 잘파세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한 Z세대(1996~2009년생)와 2010년 이후 태어난 알파세대를 합친 세대를 통칭한다. 이들은 어릴 적부터 IT기기를 자주 활용하며 성장한 탓에 ‘디지털 원주민’이라고도 불린다.
이들의 소비습관은 다양한 갈래로 나타나는데, 그중 돋보이는 것은 ‘펀슈머’다. 펀슈머란 ‘FUN(재미)’과 ‘CONSUMER(소비자)’를 결합해 만든 말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소비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펀슈머들은 자신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용 능력을 이용해 흥미로운 제품을 발견하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유한다.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비 경험을 재생산하는 만큼 기업의 입장에선 저절로 홍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셈이다.
기업들은 ‘재미’와 ‘경험’을 동시에 추구하는 펀슈머를 겨냥해 젊은 층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와 상품을 콜라보한 '캐릭터 마케팅'을 내세우고 있다. SPC삼립의 ‘포켓몬빵’의 선풍적인 인기를 시작으로 캐릭터 마케팅 열풍은 식품·유통업계 전반으로 퍼졌다.
지난달 서울경제신문 인턴기자가 직접 서울 종로구 중학동·계동·수송동 일대의 편의점을 방문한 결과, 각종 편의점에서 상품의 종류를 불문하고 일본의 캐릭터 전문 라이선스 기업인 산리오와 협업한 제품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롯데제과는 산리오와 자사의 풍선껌 제품을 결합한 ‘산리오 왓따’를 선보이기도 했다. 해당 껌은 기존 롯데 제품에 산리오 70종의 캐릭터 패키지를 더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수송동에 자리한 세븐일레븐 지점에서 캐릭터와 협업한 상품을 한 데 모아 진열해둔 것이 눈에 띄었다. 앞서 세븐일레븐은 독자적으로 산리오와 협업한 PB 상품을 만든 바 있다. 을지로2가 지하철역사 안 세븐일레븐은 소비자들의 눈에 잘 띄는 외부 매대에 산리오와 콜라보한 타사 및 자사 제품들을 다수 진열해 두기도 했다.
광화문 일대에서 만난 고등학생 박(18)양은 “평소 포차코 캐릭터를 좋아하는데, 편의점에 포차코가 그려진 제품이 있으면 더욱 눈길이 가고 사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분전환용으로 산리오가 그려진 제품들을 사는 편이다. 친구에게 가벼운 선물을 할 때도 좋다”며 “귀엽고 인기가 많은 캐릭터다보니 캐릭터가 없는 상품보다 더 눈길이 간다”고 했다.
편의점 관계자들도 이러한 현상을 체감하고 있었다. 계동에 위치한 한 편의점 직원은 “10대 학생이나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캐릭터 상품을 구매하는 비중이 높다”며 “이중 산리오가 그려진 제품의 판매량이 제일 높다”고 전했다.
코리아세븐의 관계자는 “지난해 빼빼로데이,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를 비롯해 지난 6월 휴가철을 맞아 기내용 캐리어 제품을 선보였다”며 “현재까지 누적 매출액 80억원 이상”이라고 했다.
세븐일레븐의 지난 발렌타인데이 산리오캐릭터즈 캐리어 매출은 빼빼로 데이에 비해 무려 350% 이상 증가했으며, 화이트데이 발렌타인데이 대비 150% 가량 늘었다.
지난 9월 세븐일레븐은 캐릭터 뿐만 아니라 축구 업계와도 협업한 제품도 선보였다. 한국프로축구연맹과 손잡고 출시한 ‘K리그 파니니 카드’로, K리그 인기 선수 100명과 레전드 선수 7명의 사진으로 구성됐다. 파니니 카드를 10팩 이상 구매하고 스탬프를 적립하면 추첨을 거쳐 축구선수 유니폼과 국제축구연맹(FIFA) 공인구 등을 증정한다.
평소 K리그를 즐겨보는 축구 팬이라는 20대 강모씨는 “파니니 카드를 구매하려고 세븐일레븐 어플을 깔아서 찾아다녔다”며 “K리그를 사랑하는 팬으로써 우리 팀 뿐만 아니라 타 팀 선수들의 카드까지 모아두면 의미가 있을 듯해 보관하고 추억하는 용으로 구입한다”고 말했다.
강씨는 “예전에 게토레이 음료도 축구와 협업한 제품을 내놓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많은 축구 팬들이 자신이 원하는 선수를 구매해서 마시고 보관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해당 카드를 모아 교환을 하거나, 중고거래를 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강씨는 “중고거래를 위해 사이트에 판매글을 올려뒀다. 주위 분들도 중고거래로 자주 판매한다”며 “가지지 못한 일반카드를 지인에게 구매하거나 교환하기도 한다”고 했다.
K리그 파니니 포토카드는 출시되자마자 판매 수량 기준 세븐일레븐 전체 상품 순위베스트 3위 내에 오를 만큼 높은 인기를 보여주고 있다. 코리아세븐 관계자는 “K리그 파니니 카드는 출시된 지 10일 만에 총 100만여장 판매됐다”고 말했다.
오로지 펀슈머의 마음을 공략해 100억대 매출을 달성한 기업도 있다. 바로 ‘굴뚝강아지’다.
굴뚝강아지는 특이하면서 웃긴 선물을 파는 쇼핑몰로, 주요 온라인 플랫폼인 ‘톡 선물하기’에서 잘파세대 소비자들에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간 ‘쓸데없는 선물 주고받기’가 유행하면서 굴뚝강아지를 향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쓸데없는 선물 주고받기란 생선 슬리퍼, 뱃살 힙색, 닭발 스타킹 등 보기에 황당한 만 원 내외의 상품을 친구들끼리 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굴뚝강아지의 시초는 2020년 유행했던 ‘눈오리 집게’에서 시작됐다. 윤창건 대표는 2019년 아이디어 상품 판매 브랜드를 창업했는데, 해당 브랜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눈오리 집게를 판매하는 곳이었다. 당시 방탄소년단 랩몬스터(RM)이 SNS에 눈오리 집게로 만든 눈 사진이 담긴 게시물을 게재하면서 눈오리 집게 유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에 윤 대표가 운영하는 브랜드의 눈오리 집게 판매량이 급증했다.
윤 대표는 “소비자들이 재밌는 상품에 대한 니즈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덩달아 ‘쓸모없는 선물 주고받기’라는 문화가 생기던 때이기도 했고, 우리 브랜드 인력의 젊은 층 비율이 높은 만큼 이러한 문화에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수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이러한 소비 현상을 두고 “잘파세대는 소비로 여가,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익숙한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비로 재미를 추구하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지금의 잘파세대는 재미에 값을 치르는 데 익숙한 환경에 놓였다는 분석이다.
이 연구위원은 잘파세대의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고도 했다. 잘파세대는 언뜻 발랄해 보이지만 한편으로 전례없이 좁아진 고용 시장을 견디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에 그는 “단조롭고 막막한 삶을 살아가는 도중 돌파구를 찾기 위해 소비에서 짧은 재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커진다”며 “틱톡과 숏폼의 부흥도 비슷한 맥락을 취한다. 이러한 경향이 소비에서도 나타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 또한 펀슈머 열풍 관련, “간편한 성취를 추구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기성세대는 현재를 희생해 노력한 만큼 성취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학습할 수 있는 청년 시기를 보냈지만, 오늘날 청년세대는 저성장, 기후위기,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반복적인 성취를 학습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였다”며 “이에 재미로 소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상황을 짚었다.
이 같은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고 강조한 임 교수는 “열심히 일하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은 근대주의적 사고방식”이라며 “펀슈머들의 등장은 젊은 세대들의 사고방식이 현재에 충실한 것이 중요하다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