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전지(배터리)는 전기차를 비롯해 노트북·로봇·무선가전·드론·선박 등에 쓰인다. 시계·리모컨의 건전지처럼 쓰고 버리는 1차전지에 비해 재사용한다는 점에서 2차전지로 불린다.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ESS)에 쓰이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대표적이다. 배터리가 반도체·인공지능(AI)·바이오·모빌리티·양자기술·우주 등과 함께 미래 성장 동력으로 꼽히는 이유다. 일부에서는 2차전지 시장이 반도체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는다. 전기차 등 세계 중대형 2차전지 시장에서는 한국·중국·일본이 지난해 90% 이상을 차지하며 ‘배터리 삼국지’를 펼치고 있다. 이 가운데 중국이 대규모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점유율을 65% 가까이 끌어올리면서 우리로서는 혁신 생태계 구축을 통한 퍼스트무버 도약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안게 됐다.
◇전기차 비중, 올해 둔화세이나 2030년 40% 이상
시장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8월 글로벌 전기차 인도량은 약 870만 대를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41.3% 늘었다.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54.6%의 성장세에 비하면 경기 침체, 전기차 보조금 축소 등으로 인해 다소 둔화된 것이지만 길게 보면 고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2030년에는 전체 자동차 판매 중 전기차의 비중이 40%를 넘기며 약 3500만 대가 팔릴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전기차·IT·ESS용 리튬 2차전지 세계 시장은 3726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분석된다. 전기차용 2차전지의 경우 3047억 달러로 2020년에 비해 10배나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배터리 가격 하락과 탄소 중립 움직임은 전기차 시장 확대 요인으로 꼽힌다. 배터리 가격은 생산량이 2배가 될 때마다 20%씩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2013년 1㎾h당 700달러에서 2022년 151달러까지 하락한 데 이어 2030년 87달러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 배터리 3사인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는 수주 잔액이 ‘1000조 원’을 돌파할 정도로 10년 이상 일감을 확보하고 있다. 반도체·자동차·조선·화학 등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로 출발했던 다른 산업과 달리 비교적 시장을 초기부터 주도하면서 경쟁력을 갖춘 결과다. 이 중 LG엔솔은 일본 도요타가 2025년부터 미국에서 생산하는 전기차에 탑재될 배터리를 10년 동안 공급하기로 하는 등 수주액이 500조 원 가까이 된다. 올해 1~3분기 LG엔솔의 영업이익 추정치는 1조 8000억 원 이상으로 이미 지난해 실적을 웃돈다. 삼성SDI도 3분기 영업이익만 5000억 원 가까이 된다. 다만 SK온의 3분기 영업적자가 860억 원가량이지만 손실 폭이 역대 최소치여서 기대감을 자아낸다. LG엔솔과 SK온은 미국 배터리 공장을 가동하며 현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른 첨단 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를 각각 2000억 원 이상 받아 3분기 영업이익에 반영했다. 현재 삼성SDI는 미국에서 배터리 공장 가동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 상승세 속 한·중·일 치열한 ‘배터리 삼국지’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 배터리사들의 고성장세가 이어지며 긴장감이 커지고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 1~8월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시장에서 LG엔솔의 점유율은 28.5%로 중국 CATL(27.7%)보다 조금 높다. 3위는 일본 파나소닉(15.4%), 4·5위는 SK온과 삼성SDI로 각각 10.9%와 8.9%다. 하지만 CATL의 점유율이 가파르게 성장하며 LG엔솔을 추월할 태세다. 중국은 보급형 전기차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내세워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반면 국내 배터리 3사의 시장점유율은 2021년 55.7%, 지난해 54.1%, 올해 48.3%(1~8월)로 하락세다.
전기차 시장이 미국보다 2배가량 큰 중국을 포함한 전체 글로벌 시장을 보면 국내 배터리 3사의 점유율은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2021년 30.4%, 지난해 24.1%, 올 상반기 23.7%로 하락했다. 이 기간 중국 CATL과 비야디(BYD)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41.6%, 50.5%, 52.5%로 상승했다. 다른 업체까지 합하면 60%가 넘는다. 결국 CATL이 1위이고 LG엔솔과 비야디가 2위 자리를 다투는 형국이다.
◇배터리 소재 중국 주도 속 글로벌 공급망 재편
우리 배터리 산업은 양극재·음극재·분리막·전해액 등 4대 소재의 해외 의존도가 높다. 에코프로비엠(양극재), 포스코퓨처엠(양·음극재), 엔켐(전해액), SK아이테크놀로지·더블유씨피(분리막), 삼아알미늄·동일알루미늄(알박), SK넥실리스·일진머티리얼즈(동박), 율촌화학(파우치)이 각각의 분야에서 세계 10위 이내에 있으나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세계적으로 리튬·니켈·천연흑연 등 광물 매장은 다변화돼 있으나 리튬 및 니켈 제련, 구상흑연 등 광물 가공·소재와 2차전지 소재는 중국이 글로벌 공급망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이를 바탕으로 2차전지 셀에서도 중국이 약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IRA를 시행하며 자국이나 자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의 광물을 40% 이상 사용한 배터리에만 세액공제 혜택을 주고 있다. 부품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비율이 50% 이상이어야 한다. 자국에서 배터리를 생산하는 기업에 큰 폭의 세액공제 혜택을 부여해 글로벌 배터리사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LG엔솔이 미국 오하이오, SK온이 조지아에서 앞다퉈 배터리 공장을 가동하며 신규 투자에 나서는 것은 공급망 관리와 함께 세제 등 다양한 혜택을 받기 위해서다. 중국도 고션하이테크가 최근 미시간주에 배터리 공장 건설을 승인 받는 등 지속적으로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EU는 2026년부터 배터리 온실가스 배출량 표시를 의무화하고 생산·이용·폐기·재사용·재활용 과정을 디지털화한 ‘배터리 여권’ 제도를 시행하기로 했다. 2027년부터 일정 기준 이상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만든 배터리는 시장 접근을 제한할 방침이다. 2030년까지 핵심 원자재의 EU 내 가공을 40% 이상으로 늘리고 2031년부터는 코발트·리튬·니켈 등을 일정 기준 이상 재활용하도록 했다.
◇공급망 위기·R&D 경쟁·배터리 재활용 ‘발등의 불’
기업들은 호주·캐나다·칠레 등에서 리튬·니켈 등 배터리 광물 확보에 나서고 있으나 개별 기업만의 광물 프로젝트 발굴과 투자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정부가 광물 매장·생산·거래 등 광물 지도 작성과 모니터닝, 프로젝트 발굴, 국내 제련 유도, 금융 지원 확대에 나서야 한다. 국내 민관 배터리 동맹을 통해 역량을 총결집해야 하는 것이다. 사용한 배터리를 ESS용 등으로 재활용하는 체계를 구축하고 배터리 이력 관리, 탄소 배출 측정 등 친환경성 평가·인증을 통해 민간의 배터리 재활용 시장이 꽃 피우게 해야 한다.
현재는 배터리 무단 폐기, 해외 반출 우려 등 글로벌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대응 체계가 미비한 문제점이 있다. 정부는 2030년까지 1조 원 이상을 배터리 연구개발(R&D)에 투자해 기존 삼원계 기술 극대화, 인산철 기술 확보, 미래 기술 개발, 탄소 배출량 25% 이상 감축을 목표로 세웠다. 강영구 한국화학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와 기업은 2028년까지 고에너지밀도 이차전지 공정기술 확보에 나설 방침”이라며 “전고체전지 등 차세대 배터리 분야 투자를 강화해 미래 시장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새만금 등 배터리 특화단지, 정치 리스크 피해야
정부는 배터리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올 7월 새만금 등 4곳에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를 지정했다. 전북 새만금은 양극재 핵심인 전구체 양산과 핵심 광물 가공 및 배터리 재활용, 경북 포항은 국내 최대 양극재 생산과 하이니켈 양산, 울산은 인산철 배터리 생산과 전고체 전지 개발, 2030년 마더팩토리 설립, 충북 청주(오창)는 리튬황 및 대형 원통형 양산 등에 각각 주력하는 미래 배터리 거점으로 키울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충분한 물과 신재생에너지, 넓고 평평한 땅이 있는 새만금이 ‘2차전지 밸리’ 중 하나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실제 LS그룹이 전구체와 황산메탈 공장 건립에 1조 8402억 원, LG화학이 중국 화유코발트와 함께 전구체 공장 구축에 1조 2000억 원을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 SK온은 에코프로와 함께 1조 2100억 원을 들여 전구체 공장을 짓기로 했다. 현재까지 새만금에 확정된 배터리 관련 투자액은 10조 원 가까이 된다. 하지만 기업들은 내년 새만금 예산이 5000억 원 이상 삭감되면서 인프라 투자가 제때 이뤄질 수 있을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잼버리 부실 운영 사태의 불똥이 새만금 지역에 튀며 생긴 정치 리스크를 우려하는 것이다. 전북도·새만금개발청과 함께 새만금에 2차전지 인력 양성 과정 신설을 모색하는 KAIST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2030년까지 배터리 인력 1만 6000명을 키울 방침인데 기업 5곳이 10곳의 대학에 배터리 계약학과를 운영 중이다.
송준호 한국전자기술연구원 차세대전지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은 “중국이 배터리에서 우리보다 기술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닌데 가격 경쟁력이 크다”며 “우리는 생산성이 높은 게 장점”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K배터리는 고성능은 물론 지능형, 나아가 친환경을 실현해야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이해원 전주대 석좌교수(한양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는 반도체에 비해 2차전지 인력이 부족하다”며 “정부와 지자체, 지방대, 지원 기관이 힘을 모아 2차전지 인프라 확보, R&D, 인력 양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