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먹으로 산을 표현한 듯한 대형 작품 여러 점이 벽에 걸려있다. 먼 곳에서 보면 영락없는 수묵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서 관람객은 점차 고개를 갸웃한다.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고, 먹으로 그렸다고 생각한 ‘검은색 산’ 그림은 사실 구겨진 비닐봉지를 찍은 사진이다.
비닐봉지 등 일회용품으로 풍경화를 구성하는 작가 이진경의 개인전 ‘몽유도원 2023’이 고양시립 아람미술관 상설전시장 1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고양문화재단의 2023년 고양우수작가공모 사업인 ‘고양아티스트 365’의 중진작가로 선정되며 마련됐다.
작가는 2017년 집 안에 쌓여 가는 각종 가공식품의 포장용 비닐이 현대인의 삶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느껴져 이를 촬영한 작품을 발표한 이후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연이어 선보이고 있다. 2017년 발표한 첫 번째 시리즈인 ‘홈, 스위트 홈’에서는 주로 가정에서 소비되는 식품을 싸고 있던 비닐봉지를 통해 평범한 가정의 소비를 알렸고, 2019년 ‘블랙’은 검은 비닐봉지가 가진 기억과 비밀을 다뤘다. ‘블랙’ 발표 이후 작가는 일회용품으로 풍경을 만드는 작품을 꾸준히 제작하고 있는데 이번 전시 작품은 그 중 그 일부다.
전시를 위해 작가가 직접 작성한 작가 노트에는 자연을 향한 작가의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작가는 산이 아프다고 느낀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쌓여 가는 비닐 봉지도 분리 수거하면 재활용이 되는 줄 알았지만 대부분은 태워지거나 땅에 묻힌다”며 “일회용품이 작은 산이 되어 어느 산 속에서 숨을 내쉬고 있다”고 표현한다. 차마 내보내지 못하고 쌓여 가던 검은 비닐봉지를 모으고 구겨서 산과 땅을 닮은 풍경을 만든 작품이 바로 ‘몽유도원’과 ‘진경산수(盡景山水)’다. 산수화처럼 보이는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사실은 번들거리는 구겨진 비닐봉지로 가득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은 가짜 자연이 아닐까”라며 한탄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검은 비닐봉지 산수에 이어 ‘스톤' 시리즈도 함께 발표했다. 역시 파괴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담은 작품이다. 오래 전 해변을 걷던 작가는 하얗고 예쁜 돌을 집어 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닳아서 돌의 모양이 된 스티로폼이었기 때문이다. 스티로폼이 파도에 닳아 조약돌처럼 되는 동안 나머지 조각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작은 미세 플라스틱 조각은 결국 고스란히 인간의 배로 돌아올 것이다. 작가는 돌이 모양이 된 버려진 스티로폼을 촬영한 ‘스톤’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면 괜찮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시는 12월 1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