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밴드 ‘혁오’가 발매한 정규앨범 ‘23’에 수록된 곡 톰보이(TOMBOY)' 뮤직비디오에는 ‘불 사람’이 등장한다. 검은색 선으로 그린 사람은 불꽃의 형상을 하고 피어올랐다 다시 소멸한다. 가수와 곡의 인기만큼 화제가 된 이 뮤직비디오의 애니메이션을 그린 이는 30대의 젊은 작가 박광수. 검은 선으로 가득한 흑백 회화로 촉망받는 젊은 작가 반열에 오른 그가 이번엔 여백 하나 없이 빽빽한 유채색 선으로 가득한 새로운 회화를 들고 대중 앞에 섰다.
지난 8일부터 박광수의 개인전이 열리는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는 입구부터 빨강, 노랑, 파랑으로 뒤덮인 기이한 숲을 연상시킨다. 알록달록한 선으로 가득 채워진 커다란 캔버스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전시장 벽면을 차지하고 있어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작가는 2021년 이전까지 주로 검은색 선으로 화면을 채우는 그림을 그려왔다. 당연히 재료는 먹이나 잉크, 아크릴이었다. 이후 아트페어 등을 통해 간간히 채색화를 선보이며 변화의 모습을 보였다. 이번 전시작은 그가 유화 물감을 사용해 본격적으로 유채색 작가로 변신 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작가는 “본래 유화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유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며 “마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유화의 특성 덕분에 물감을 긁어내는 등 표현의 방식도 다양해졌다”고 작품을 설명했다.
실제로 유화의 기름기가 더해지면서 작품은 진득해졌다. 특수 제작한 붓으로 굵은 선의 가운데에는 물감이 묻어나지 않고, 양 옆에만 물감의 색이 드러나도록 하는 기법은 화면을 더욱 현란하게 만든다. 수많은 선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가운데 규칙성과 짜임새가 보이는 것도 작품을 신비롭게 만드는 요인다. 전시장에는 작가가 직접 제작한 습작 노트가 전시돼 있다. 작가는 모든 작품을 이처럼 습작한 후 그대로 캔버스에 구현하는데, 무작위로 수놓은 듯한 선이 유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매 작품마다 꾸준히 고민하고 연습한 결과다.
그림 속에는 꼭 한 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은 누워 있거나 서 있다. 기괴한 표정을 짓고 관객을 바라보거나 나무 숲 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과거에는 이런 사람들이 흑백으로 묘사돼 알아보기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색이 들어가면서 좀 더 뚜렷해졌다. 작품 속에 사람이 있음을 명확히 알리는 것도 이번 전시작의 변화 중 하나다. 작가는 작가 노트를 통해 “그림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많은 경우 본인이 처한 가혹한 상황을 감내해 내고 있다”며 “그 끝은 대부분 실패인데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림에서 색들이 충만하게 매혹적이기도 위협적이기도 하며 서로 간의 강렬한 충돌로 그 세계가 극단적이길 원한다”고 설명했다.
30대의 재기발랄한 작가는 30여 점의 모든 신작에 이름을 붙였다. ‘망치질’, ‘다 컸네’ 등의 제목은 그림 속 인물과 어우러져 대체 이 그림 속 공간은 무엇을 하는 곳이며,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마치 신화 속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주에서 떨어진 외계 생명체 같기도 하다. 대부분은 옷을 입지 않았고, 일부 인물은 발 끝이 명확하지 않다. 모든 작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이들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며 숲과 같은 전시장을 거닐게 만든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모든 작품을 모두 올해 완성했다. 이 중에는 100호가 넘는 대작도 더러 있다. 작가의 작품은 이미 지난해 학고재 그룹전과 아트부산, 키아프(Kiaf) 등에 소개되며 수많은 컬렉터들에게 주목 받아왔다. 갤러리 측은 “박광수는 현재 국내외 미술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청년 작가 중 한 명'이라며 “이번 전시 작품 중 100호 크기 뿐 아니라 모든 작품이 8일 개막 전 완판됐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