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원자력발전 생태계 복원을 외치면서 원전 업계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신한울 3·4호기 등 원전 건설이 재개됐고 이집트 엘다바 원전 건설 사업권을 따내는 등 수출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위기와 탄소 중립 가속화로 원전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는 점 역시 호재다. 하지만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인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1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 폐기를 선언했음에도 현장에서는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며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는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이 들어가야 원전 생태계가 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방사성폐기물 포화 문제와 유럽연합(EU)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영구 처분장 마련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백지화했는데 업계 분위기는 어떤가.
△윤석열 정부가 탈원전 폐기를 외쳤지만 실질적으로는 바뀐 게 없다. 원전 생태계 부활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원전 건설이 중요하다. 하지만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이 포함되지 않았다. 원전 비중을 30% 이상으로 높이겠다는 게 대통령의 공약이었는데 원전을 늘리는 게 아니라 전력 수요를 줄이는 방식으로 30%를 맞췄다. 정부가 원전 생태계를 복원시키겠다면서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지만 신규 원전 건설 없이는 원·하청 업체들이 지속적인 투자와 인력 채용을 하기 어렵다.
-현재 새울 3·4호기 등 원전 건설이 이뤄지고 있지 않나.
△새울 3·4호기, 신한울 3·4호기 등이 건설되고 있다. 하지만 이 원전들의 주요 부품은 이미 완성된 상태로 공장에서 대기 중이고 건설만 남아 있다. 신규 원전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원전들은 건설 업계에는 도움이 되지만 원전 산업 부활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원전 부활’을 외쳤음에도 정책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말인가.
△공무원들은 영혼이 없다고 하는데 원전 분야에서는 영혼이 있는 것 같다. 다행히 정부가 2024년부터 적용되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는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포함시키겠다고 했고 장관도 바뀌었기 때문에 기대감은 있다.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의 문제점은 생태계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데 있다. 원전은 계획 10년, 건설 10년, 운전 60년 등 거의 100년을 주기로 움직이며 이에 맞춰 생태계가 조성된다. 문재인 정부는 최소 3년 이상 원전 건설을 중단시켜 생태계 균형을 깨버렸다. 이 균형을 회복시키려면 11차 계획에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또 신규 원전을 추진하더라도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줘야 한다. 대표적인 게 주52시간제다. 주52시간제 도입으로 건설 기간이 30% 늘어나 비용이 급증할 것이다. 부품 중 일부는 단종된 것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은 정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등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영국은 2003년 토니 블레어 총리 때 수립한 에너지 전환 계획을 20년 동안 유지하고 있다. 노동당 출신인 블레어 이후 총리가 여섯 번 바뀌었고 보수당 정권이 들어섰지만 에너지 정책은 손대지 않았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해서 국민 삶의 기본 인프라인 에너지 정책을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갑작스레 집권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환경·시민단체의 지원을 받았고 그 대가가 탈원전 정책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원전이 많은 공격을 받는 것은 기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라고 본다.
-향후 에너지 수요와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원전이 얼마나 더 필요한가.
△경제 상황에 따라 전력 수요를 예측하는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있다. 탄소 중립과 같은 추가적 변수 때문이다. 탄소 중립을 위한 추가적 전력 수요까지 감안하면 신규 원전이 두 자릿수, 즉 최소 10기 이상은 돼야 한다. 탄소 중립을 하려면 모든 에너지를 전기화·수소화해야 하며 이런 막대한 전기를 만들려면 결국 원전을 늘릴 수밖에 없다. 신재생에너지와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을 늘리자는 주장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태양광과 풍력의 발전 효율이 각각 캘리포니아의 절반, 영국 북해의 절반에 불과하다. LNG 발전은 백업용이다. 문재인 정부는 원전을 줄이고 신재생에너지를 늘리는 과정에서 전력 공급의 안정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LNG 발전을 늘렸다. 그런데 LNG 발전을 늘리면 위험 부담이 크다. LNG를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천연가스 자체보다 액화와 기화에 소요되는 비용이 더 많아 기화 가스를 바로 사용하는 유럽·미국 등보다 비용이 비싸다. 시장 규모가 작다 보니 가격 변동성도 크다.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에너지 믹스’ 전략에서 원전 비중을 높일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에너지 정책은 안정적 공급, 사회적 비용 최소화 등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수립돼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신재생에너지는 효율이 낮고, LNG 발전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유럽의 사례에서 보듯이 안정성이 떨어지고 비싸다. 2022년 전력 정산 단가를 보면 ㎾h당 원자력이 52원, LNG는 239원, 신재생에너지는 271원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환경 운동가들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더라도 전기 값 상승분이 맥주 한 잔 값에 불과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한국전력은 수십조 원의 적자를 냈다. 결국 탄소 중립을 실현하면서 안정적으로 싸게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원은 현재로서는 원자력이다.
-원전의 문제점 중 하나가 핵폐기물 처리다. 당장 사용 후 핵연료 저장 시설 포화 문제가 심각한데.
△사용 후 핵연료 저장 시설의 포화가 머지않았기 때문에 중간 저장 시설이나 영구 처분장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전 중단 사태가 올 수 있다. 제일 급한 곳이 한빛 원전이다. 이곳의 사용 후 핵연료 저장 시설은 2030년부터 포화에 이를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해법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영구 처분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아홉 차례나 영구 처분장을 마련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고준위 폐기물을 보관만 하는 시설이어서 원전보다 위험하지 않은데도 선동가들이 기술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호도하면서 들고 일어나면 정부와 정치권이 손을 들어버렸다. 영구 처분장이 없으면 중간 저장 시설이라도 지어야 한다.
-EU의 택소노미 친환경 투자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영구 처분장이 필요하지 않나.
△EU의 택소노미에 따라 2050년까지는 영구 처분장 건설을 위한 국가 계획이 완전히 수립돼야 한다. 후보 부지를 선정하고 굴착 작업을 한 뒤 지하 환경의 적정성 여부를 조사하고 10년 이상 안전성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부지 선정부터 굴착, 안정성 확인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시작해도 빠듯하다. 영구 처분장은 1000년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보관하고 잊어버리자는 개념이다. 500m 이상 지하에 설치하도록 하고 있는데 차폐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봉인하자는 개념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전문가의 말을 믿고 일관성 있게 추진해나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하다.
-소형모듈원전(SMR), 핵융합 발전 등 다양한 에너지원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데.
△SMR이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SMR은 대형 원전을 지을 입지 조건이 안 되거나 건설비가 너무 비싼 곳에서 유용하다. 하지만 대형 원전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예 새로운 시장이라고 봐야 한다. SMR의 활용처는 다양한데, 특히 대형 선박의 추진체로 사용되면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낼 것이다. 선박의 운항 속도가 2배 이상 빨라지면서 물류 혁신이 일어날 것이다. 중간 급유지가 없어도 된다. 더구나 국제해사기구(IMO)에서 컨테이너선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규제하고 있는 만큼 원자력이든 수소든 새로운 추진체로 운항되는 선박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SMR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야 한다. 다행히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세계적인 SMR 기업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 문제는 이 인력들을 통합할 수 있는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최근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괴담’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게 부담이 됐을 텐데.
△불필요한 논쟁으로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과학적 사실을 정확히 제시해 국민들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사용 후 핵연료 문제도 마찬가지다. 원자력발전소에서 45년간이나 안전하게 보관한 것을 기술적으로 영구 보관이 안 된다고 호도해서는 안 된다. 원전에 대한 오해가 많다 보니 고급 인재도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더구나 주요 원전 기업이 지방에 있어서 인력 수급이 더 어렵다. 원자력 전문가를 지역 가점으로 뽑는 것도 손봐야 한다. 지역대학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지만 핵심 산업 인재를 실력이 아니라 출신 대학을 감안해 뽑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에 전문성과 역동성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He is…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성고와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원자핵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근무하다 제주대를 거쳐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원자력정책자문위원, 산업통상자원부 전력정책심의위원도 지냈다. 탈원전 정책의 문제점과 후쿠시마 오염수 논란에 대한 과학적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