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진작 이런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요?”
“시술 과정이 정말 단순하네요. 최소침습수술을 수없이 경험해 본 저로서도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
올해 6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메디컬센터. 임상연구자 대상으로 열린 핸즈온(hands-on) 워크숍에서 정창욱 서울대병원 비뇨의학과 교수가 고혈압을 유도한 실험용 돼지의 신장 혈관에 ‘하이퍼큐어’를 이용한 복강경 신장신경차단술(RDN·Renal Denervation) 시범을 보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고혈압은 전 세계 15억 명 이상이 앓는 만성 질환이다. 한국에서도 20세 이상 성인 인구의 28.4%가 고혈압 진단을 받았다. 간단한 혈압 측정으로 진단이 가능한 고혈압은 장기간 효과와 안전성이 입증된 약제가 수 십 종에 달한다. 그럼에도 뇌졸중·허혈성 심질환·심부전 등 치명적인 합병증을 유발해 주요 사망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문제는 새로운 약제를 추가하고 복용량을 늘려도 좀처럼 혈압이 잡히질 않는 환자들이다.
학계에서는 이뇨제를 포함해 작용기전이 다른 세 가지 이상의 항고혈압제를 최대 용량으로 병용해도 140/90mmHg 미만으로 조절되지 않는 경우를 ‘저항성 고혈압(resistant hypertension)’이라고 부른다. 대한고혈압학회에 따르면 심혈관질환 위험이 높은 다른 고혈압보다 1.5배 높은 고위험 환자의 47.6%는 여전히 혈압 140/90mmHg가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5개 이상 약제를 사용해도 조절이 안되는 치료불응고혈압(refractory hypertension)은 심혈관질환 사망률이 5배 높다는 보고도 있다.
RDN의 대상은 이처럼 약물만으로 고혈압이 조절되지 않는 환자들이다. 신장동맥 주위를 지나는 교감신경 다발을 고주파 에너지로 차단함으로써 고혈압의 주요 원인으로 알려진 교감신경계의 과도한 흥분을 억제한다. 수술을 통한 고혈압 치료의 역사는 100년 가까이 된다. 정 교수는 “1930년대에는 가슴을 열고 흉추 또는 요추 주변의 교감신경 전체를 외과적으로 절단하는 교감신경절제술이 심한 고혈압의 유일한 치료법으로 혈압 강하 효과가 뛰어났다”고 설명했다. 다만 상위 레벨의 교감신경을 비선택적으로 차단하다 보니 수많은 부작용이 나타났고 다양한 항고혈압제가 개발되며 자연스레 잊혀졌다. 2000년대 들어 ‘내과적인 치료 만으로 혈압을 조절하는 데 한계를 느끼면서 신장으로 들어가는 교감신경만 선택적으로 차단하는 RDN 기술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평생 고혈압약을 복용하는 대신 고혈압을 완치할 수 있는 혁신 기술에 대한 수요도 크다.
실제 존슨앤드존슨(J&J)·메드트로닉·보스턴사이언티픽 등 내로라 하는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들은 앞다퉈 RDN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현재 전 세계 성인 고혈압 환자의 약 9%는 저항성 고혈압으로 추정된다. 어림잡아도 1억 3500명 가량의 환자가 존재하니 욕심 낼 만한 시장이다. 하지만 성과는 더뎠다. 자체 개발한 신장신경차단기기가 미국식품의약국(FDA) 허가 관문을 통과한 업체는 단 2곳으로 지난 10월과 11월에야 승인이 났다. 메드트로닉은 아디안(Ardian) 인수를 통해 확보한 ‘심플리시티’ 카테터 RDN 시스템이 지난 10월 FDA 승인을 받기까지 13년이 걸렸는데 임상연구에서 확인된 혈압 감소 폭이 4~5mmHg 수준이라 실제 임상에서의 유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날 정 교수가 선보인 ‘하이퍼큐어’는 신장동맥 외벽에서 주변 신경을 차단하는 전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복강경 RDN 기술이다. 시술자가 환자의 등으로 복강경 전극을 넣어 신경차단이 필요한 신장동맥의 외벽 가까이 접근시키고 스위치를 누르면 관절 조립제가 자동으로 전진하며 혈관을 360도로 완전히 감싼다. 본체에 해당하는 범용전기수술기를 작동시키면 일정한 고주파 에너지를 전달한 다음 자동으로 작동이 멈춘다. 목표 혈관의 원위부와 근위부에서 이러한 과정을 각각 시행하면 신장신경이 완전히 차단되어 혈압을 효과적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정 교수는 “컴퍼스를 이용하면 원하는 크기의 원을 반복적으로 매끈하게 그려낼 수 있듯이 누구나 쉽고 안전하면서도 효과적인 RDN 시술이 가능한 플랫폼기술을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카테터 기반의 RDN 기술은 혈관 안에서 밖으로 에너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혈관 내피가 손상될 위험이 컸다. 혈관 손상을 피하려 약한 에너지를 사용하니 외부 신경을 제대로 차단할 수 없었다. 3mm 이내의 작은 혈관에는 적용하기도 어려웠다. 그에 반해 ‘하이퍼큐어’는 혈관 밖으로 접근해 혈관 외부에 있는 신경을 차단하기 때문에 혈관 내피 손상이 전혀 없으면서도 완벽에 가깝게 신장신경을 차단할 수 있다. 기존 기술의 근본적인 문제를 전부 해소한 것이다.
정 교수는 2014년 카테터 방식의 RDN 기술을 평가한 글로벌 임상시험이 실패하자 원인을 파헤치다 하이퍼큐어의 초기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다. 기초연구 등을 거쳐 기술을 고도화하고 2019년 딥큐어를 창업하며 본격적인 제품화 작업에 착수했다. 올해 7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하이퍼큐어를 혁신 의료기기로 지정하기까지 약 9년이 소요된 셈이다. 하이퍼큐어는 서울대병원·한양대병원·세브란스병원·서울성모병원·화순전남대병원 등 5곳에서 최초 인체 적용 임상시험에 착수했다. 3가지 이상의 항고혈압제를 복용 중인 저항성 고혈압 환자 중 적합한 대상을 탐색 중이다. FDA 허가를 목표로 글로벌 임상도 준비하고 있다.
논문을 통해 하이퍼큐어 기술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해외 연구자들은 물론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들도 러브콜을 보내온다. 정 교수는 “한국에서 개발된 혁신적인 의료기술이 실제 임상에서 적용될 순간을 고대하고 있다” 며 “고혈압을 넘어 심방세동, 폐동맥고혈압 등으로 범위를 넓혀 전 세계 수많은 난치성 만성질환자들에게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