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배우 정해인이 열연한 오진호 소령의 실제 인물인 고 김오랑 육군 중령의 조카가 "군인이 천직이셨던 분"이라고 삼촌을 기억했다.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에 맞서다 전사한 고(故) 김오랑 소령(1990년 중령 추서)의 조카 김영진(66)씨는 지난달 30일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1979년 12월 13일 0시 20분 신군부의 제3공수여단 병력은 M16 소총을 난사하며 특전사령부를 급습해 반란을 진압하려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 했다.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 소령(당시 35세)은 권총을 쏘며 쿠데타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숨졌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김씨가 삼촌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2·12 군사반란이 있기 한 달여 전이었다. 10·26 사건으로 계엄령이 내려진 부산 서면 거리에서 계엄군과 이야기를 나누던 삼촌과 잠깐 눈인사를 나눈 것이 마지막이었다.
삼촌을 '군인이 천직이셨던 분'으로 기억하는 김씨는 "평상시에도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 영향이었는지 조카들한테도 엄한 삼촌이셨다"며 "조카들이 비실댄다고 당신께서 다니던 체육관에 데리고 다니면서 '운동 좀 시켜달라'고 부탁하곤 했다"고 했다.
12·12 다음 날 저녁이 돼서야 김 소령이 숨졌다는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됐다. 김 소령의 형들은 서둘러 시신이 안치된 서울 국군통합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슴과 배 등에 6발의 총탄을 맞은 김 소령의 시신은 거의 두 동강이 나 군의관이 애써 봉합하고 있었다. 신군부는 김 소령의 시신을 특전사 뒷산에 암매장했다.
김씨는 "온 집안이 '개천에서 용이 났다'며 삼촌이 머지않아 별을 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면서 "집안의 희망이었던 삼촌이 처참하게 죽은 것도 모자라 동네 강아지처럼 야산에 묻힌 충격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김 소령의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죽은 충격에 치매를 앓다가 2년여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 소령의 큰형이자 김씨의 아버지인 김쾌출 씨도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연일 술을 마시다 1983년 간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소령의 아내 백영옥 여사는 남편의 죽음 뒤 시신경 마비가 심해져 완전히 실명했다. 민주화 이후 백 여사는 전두환·노태우 씨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준비했으나 1991년 자신이 운영하던 불교 복지기관 마당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씨는 "수사관들이 숙모의 죽음은 실족사니까 너무 떠들지 말라고 하더라"며 "정병주 전 사령관 역시 숙모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야산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것까지 생각해보면 숙모의 죽음도 타살이 아닌지 의심된다"고도 했다.
직계 후손이 없는 삼촌의 삶과 희생을 누군가 나서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김씨는 2000년께 김 소령의 특전사 20년 후배인 김준철 씨와 함께 '참군인 김오랑 추모사업회'를 꾸렸다.
2014년 정부는 김 소령에게 보국훈장을 추서했다. 김 소령이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접적 지역에서 적의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으로 뚜렷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무공훈장 추서 요건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었다.
이에 대해 김씨는 "정부도 삼촌이 '전사'한 것이라고 결정한 만큼 이제라도 무공훈장으로 바꿔주는 게 맞다고 본다"며 "육군사관학교와 특전사령부 안에 삼촌의 흉상까지 세워진다면 그토록 매달렸던 명예 회복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국방부는 김 소령의 사망을 '순직'에서 '전사'로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