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중대재해법 확대 다그칠 일 아니다

함병호 한국교통대 교수
악재 덮친 중기, 안전보다 생존 우선
"내년부터 확대" 채근은 배려 부족
법 적용 유예하고 지원 역량 집중
안전 자구노력 다하도록 힘 보태야



충남 공주 소재 농공 단지에서 40여 년간 사업체를 운영해온 한 기업인은 요즘 한숨이 늘었다. 내년 1월 27일부터 확대 적용되는 중대재해처벌법 때문이다. 혹여 발생할지 모르는 중대재해로 대표가 구속되고 회사가 문을 닫으면 30년 이상 함께 해온 동료 근로자들은 어디로 가나. 건실하게 자리를 지켜온 1세대 농공 단지 입주 기업이 폐업 우려에 떨고 있다.


제정 당시 논란이 컸던 중대재해처벌법이 다시 격랑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쟁점은 50인 미만 기업에 대한 추가 적용 유예 여부다. 내년 1월 27일 근로자 50인 미만 기업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에 앞서 현장 중소기업들은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면서 추가 적용 유예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노동계는 기간이 도래했으니 예정대로 적용하자는 입장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50인 이상 중·대규모 기업에 먼저 적용됐다. 먼저 적용받은 기업들은 나름대로 큰 비용을 들여 안전 투자도 하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어렵고 부담스러워한다. 정부는 비교적 여건이 열악한 50인 미만 기업의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을 위해 컨설팅, 교육, 시설 개선 등 전방위 지원을 지속해왔다. 그럼에도 지난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50인 미만 기업 641개사 가운데 76.4%가 ‘준비 부족’, 89.9%가 ‘적용 유예 필요’라고 답했다.


그간 준비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적용 유예를 호소하는 것은 왜일까. 지난 몇 년간 코로나19·고물가·고금리 등 피할 수 없는 악재가 중소기업을 덮쳤다. 그들의 목전에 닥친 문제는 생존이었다. 열악한 상황을 모두가 아는데 대기업도 어려워하는 일을 적용 시점이 됐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적용하자는 것은 일종의 배려 부족으로 보인다.


9월 7일 50인 미만 기업 등에 2년간 법 적용을 추가 유예하는 내용의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유예는 법률적 의미에서 ‘일의 결행을 미루는 것’ 외에 ‘보호관찰’의 뜻이 담겨 있다. 유예 기간 중에 중소기업은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을 위해 무슨 조치를 할 것인지, 정부는 무엇을 지원할 것인지 등을 꼼꼼하게 정하고 지켜가야 한다. 계획이 실현 가능하고 바람직할수록 적용 유예에 대한 공감대도 커질 것이다.


이러한 방향에서 올 1월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년, 성과와 한계’ 세미나에서 한국안전학회와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이 밝힌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이행 지원 원칙’을 다시 한번 제시하고 싶다. 원칙은 ‘정부는 50인 미만 기업에 지원 역량을 집중하고 지속 지원한다’ ‘대기업은 협력업체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지원을 강화한다’ ‘지역 노사민정과 학계를 망라한 거버넌스가 함께 안전 이행 관행을 확산한다’ 등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다. 중소기업의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은 법을 적용하고 처벌하면서 채근할 일이 아니다. 열악한 여건에도 포기하지 않고 준비해나갈 수 있도록 정부의 치밀한 계획과 지원이 절실하다. 또 지속 가능한 안전 지원 체계하에서 중소기업은 각고의 자구 노력을 계속하고 근로자와 학계도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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