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간접투자상품으로 자리잡은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이 어느새 120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ETF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직장 초년생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투자상품은 펀드였는데요. 하지만 간편하게 거래할 수 있는 주식의 편리함과 개별 종목 투자보다 안정적인 패시브 펀드의 장점만을 모은 ETF는 서서히 존재감을 키우며 지난 상반기 드디어 20년 만에 순자산(AUM) 100조 원을 돌파하더니 6개월이 채 안돼 120조 원까지 성장한 겁니다.
그렇다면 펀드를 만들어 운용 수수료로 사업을 영위하는 자산운용사들은 ETF의 성장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오늘은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ETF 시장의 특징과 이를 보고도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자산운용사들의 현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일 펀드평가사 KG제로인에 따르면 지난 11월 말 ETF 전체 순자산은 121조 4000억 원으로 올해 들어서만 42조 9000억 원 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운용사들은 144개의 신규 ETF를 쏟아내며 시장 확대를 이끌었습니다. 올해 상장된 ETF의 순자산은 11월 말 기준 20조 3500억 원을 기록했는데요. 이는 연초 이후 전체 ETF 증가 규모의 절반 수준입니다. 시장의 니즈에 맞는 신상품을 제 때 출시했고 투자자들이 이에 호응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올해 ETF 성장을 견인한 건 다름 아닌 불확실한 증시 상황에서 대기성 자금을 파킹해두는 단기형 상품들이었습니다. 하루만 넣어도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양도성 예금증서(CD) 금리, 한국무위험지표금리(KOFR), 만기매칭형 ETF에는 뭉칫돈이 몰렸습니다. 실제 8일 기준 올 들어 순자산이 가장 많이 증가한 ETF 1~3위는 ‘TIGER KOFR금리액티브(합성, 4조 6400억 원)’와 ‘TIGER CD금리투자 KIS(합성, 3조 7700억 원)’, ‘KODEX KOFR금리액티브(합성, 1조 8100억 원)’로 모두 금리형이 차지했습니다. 이밖에 채권형과 배당형 등 안정성에 방점을 둔 ETF들이 일제히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테마형 중에서는 ‘TIGER 2차전지소재Fn’와 ‘TIGER Fn반도체TOP10’ 등 2차전지와 반도체를 필두로 한 기술주 투자 상품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특히 ‘KODEX 미국FANG플러스(H)’와 ‘TIGER 미국테크TOP10 INDXX’는 각각 연초 이후 84.3%, 83.5% 상승하며 전체 ETF 수익률 1, 2위를 나란히 차지했습니다.
ETF 시장이 이토록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 있는 곳은 소수의 자산운용사 뿐입니다. 전체 시장 점유율의 80% 가까이를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에 양분하고 있고 KB자산운용(7.6%)과 한국투자신탁운용은(4.7%)로 3~4위를 기록 중입니다. 그 뒤로 키움과 한화, 신한 등이 시장 점유율 2%대로 그나마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고요. 24개사가 ETF를 출시한 가운데 상위 8개사의 시장 점유율이 96%를 넘는 겁니다.
이들 중에서 현재 ETF로 실제 수익을 내는 곳은 삼성과 미래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보수를 낮추고 마케팅에 집중해서 일단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게 최우선 목표입니다. 즉, 이들 운용사에 ETF는 아직은 비용이란 얘깁니다. 마치 스타트업이 먼저 고객을 확보해 인지도를 높인 후 손익분기점(BEP)을 넘어 수익창출을 하는 전략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투자금이 넘쳐나지 않는 이상 스타트업이 데스밸리(Death Valley·초기 창업 기업이 연구개발(R&D)에 성공한 후에도 자금 부족 등으로 인해 사업화에 실패하는 기간)를 넘기 어려운 것처럼 소형 자산운용사들에게도 ETF는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많은 자산운용사가 수수료 출혈경쟁에 나서고 특정 운용사가 특색 있는 상품으로 히트를 치면 곧바로 베끼기 출시로 결국 대형사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올 상반기 출시한 신한자산운용의 ‘SOL 2차전지소부장’ ETF가 대표적입니다. 출시 첫날 한 시간 만에 완판될 정도로 투자자들의 인기를 모았는데요. 얼마 후 유사한 ETF들이 줄줄이 상장되면서 ‘최초 출시’라는 말이 무색해졌습니다. 중소형사들은 대형사들이 베끼기 상품을 출시해 고객몰이를 할 때마다 허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달리 해석하면 대형사들도 이런 흐름에 합세할 정도로 시장의 경쟁이 치열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ETF 시장이 120조 원까지 성장했는데도 자산운용사들이 웃을 수 없는 이유는 실적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올해 3분기 전체 465개 자산운용사들의 절반이 넘는 249사(53.5%)가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자산운용사의 본업 수익인 수수료 수익이 9854억 원으로 전 분기보다 370억 원 감소했는데요. 수수료 수익은 2021년 이후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펀드 수수료와 일임자문 수수료 역시 감소세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즉, ETF의 성장이 아직 운용사들의 배를 불려주진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운용사들은 말그대로 생존경쟁에 돌입했습니다. 특히 소형사일수록 절박함은 더 느껴지는데요. 예컨대 BNK자산운용은 기존 ETF 조직을 통폐합하고 외부에서 영입한 인력을 내부 인력으로 교체하며 시장 진출 2년 만에 다소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면 IBK자산운용과 트러스톤자산운용은 기존 조직을 정비해 이달 중 첫 ETF 상품을 출시한다고 밝혔는데요. 후발주자여도 일단은 시장에 진입해 점점 더 커지는 파이의 일부라도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과 과연 언제까지 증가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 사이에서 많은 운용사들이 고민은 깊어져가고 있습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야 하는 건 대형사라고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삼성자산운용은 최근 국내 운용사 최초로 미국에 토종 ETF를 수출하는 성과를 일궈냈지만 이를 주도한 담당 부문장은 정작 이번 정기 승진 대상자에서 누락됐습니다.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ETF가 겉으로 보이는 가파른 성장세 만큼 운용사들의 당장의 먹거리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는 것 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산운용업계 한 관계자는 “대형사나 중소형사나 ETF로 큰 수익을 내지는 못하는 게 사실”이라며 "특히 아직까지 ETF를 출시하지 않는 소형사들은 시장이 성장할수록 고민이 더 깊어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