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은이 정부에 영향”…지방거점도시·가족예산 확대도 通할까 [조지원의 BOK리포트]

한은 통화정책 독립성 우려에 반박
가계부채 공론화로 한은 역할 확대
초저출산·수도권 집중 등 문제 분석
잠재성장률 올릴 방안 내놓았으나
실제 정부 정책으로 시행될지 관건

왼쪽부터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지난 9월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 앞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은행이 정부를 만나서 정부에 영향을 준다고는 왜 생각 안 하세요? 저는 한국은행이 좋은 아이디어와 좋은 정책을 가지고 계속 이야기하면 정부가 들을 것 아닙니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30일 기자 간담회에서 정부와의 잦은 만남으로 영향을 받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같이 반박했다. 이 총재는 매주 주말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과 이른바 ‘F4(Finance 4)’로 불리는 회의를 통해 현안을 논의한다. 이에 한은의 통화정책 독립성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자 오히려 반대로 한은이 정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받아친 것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30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2023.11.30 사진공동취재단

이 총재의 자신감은 가계부채에 대한 정부의 태도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정부는 올해 초 부동산 규제를 완화한 데 이어 특례보금자리론 등 정책 모기지를 통해 집값 하락 방어에 나섰다. 이에 가계부채가 다시 늘어나자 일부 금융통화위원들과 한은 내부에서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50년 주택담보대출를 규제하는 등 정부의 태도가 바뀌는 계기가 됐다. 금융권에서는 정부가 이토록 빠르게 태세 전환에 나선 것은 한은의 역할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총재도 “가계부채를 한은이 공론화하고 현재 우리나라가 가진 금융 불안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인 만큼 이를 중장기적으로 고쳐야 한다는 이슈를 한은이 많이 제기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은이 정부에 영향을 준 예시 중 하나로 가계부채를 언급했다.



서울 시내 아파트 모습. 연합뉴스

이 총재가 한은의 아이디어를 정부 정책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한 만큼 한은 안팎에서는 새로운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최근 한은 내부에서 저출산·고령화와 수도권 집중화 등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현안에 대한 분석과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한 보고서가 잇따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달 3일 발표된 ‘지역 간 인구이동과 지역경제’ 보고서와 지난달 30일 경제전망보고서에 수록된 중장기 심층연구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극단적 인구구조의 원인, 영향, 대책’ 보고서다. 전자는 한은 조사국 지역경제부, 후자는 한은 경제연구원이 각각 맡았다.


조사국 보고서는 수도권 집중 현상이 해소되지 않아 전국 출산이 감소했다는 연구인 반면 한은 경제연구원 보고서는 초저출산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으로 고용 불안과 경쟁 압력, 주거 불안, 양육 불안 등을 꼽았다. 두 보고서는 다른 방법으로 분석했으나 수도권의 높은 인구 밀도로 인한 경쟁 등이 초저출산과 같은 고질적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체계적인 분석으로 여론의 공감도 얻고 있다.



저출산 완화를 위한 정책 제언과 예상 효과. 사진 제공=한은 블로그 '초저출산 및 초고령사회(2)

문제는 한은이 제시하는 구조 정책 대부분이 시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은이 초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구조 정책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완화’, ‘주택가격 하향 안정과 가계부채 안정화’, ‘수도권 집중 완화’, ‘교육과정에서의 경쟁 압력 완화’ 등이다.


여기서 수도권 집중 완화는 여당이 구상하는 ‘메가 서울’과는 결이 다르다. 한은이 말하는 수도권 집중 완화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주요 도시들이 서울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지역의 거점도시가 돼야 한다는 의미다. 반면 ‘메가 서울’은 김포 등 경기도 일부 도시를 서울로 편입해 서울의 규모를 더욱 키워서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이다. 여기에 집값 하향 안정과 가계부채 안정화 등도 정부 입장에서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


예산 관련 언급도 포함돼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평균(2.2%)에 못 미치는 GDP 대비 가족 관련 지원 예산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기준 GDP 대비 1.55%인 가족 관련 지원 예산을 OECD 평균까지 올릴 경우 출산율이 0.06% 높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일 서울 한국은행 별관에서 인구구조 변화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과제를 주제로 열린 지역경제 심포지엄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은 경제연구원은 성장회계 분석 결과 정책적 노력을 통해 출산율을 약 0.2명 높일 경우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을 2040년대 평균 0.1%포인트 높아질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동안 이 총재가 고민해왔던 중장기적인 잠재성장률 하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앞으로의 관건은 이러한 분석 결과가 정책을 통해 얼마나 현실화되느냐다.


이 총재가 참여하는 F4 회의는 2차 개각 이후로도 변화가 크지 않을 전망이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이미 경제수석일 때부터 F4 회의에 참여해 왔고 신임인 박춘섭 경제수석은 한은 금융통화위원으로 이 총재와 호흡을 맞춰왔다. 다만 F4는 단기적인 시장 대응이 주력인 만큼 한은의 중장기 정책이 현실화하려면 이번에 신설된 대통령실 정책실장과의 소통이 더욱 중요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 ‘조지원의 BOK리포트’는 국내외 경제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Bank of Korea)을 중심으로 국내 경제·금융 전반의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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