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서 국내 주요 그룹 중 처음으로 ‘그룹노조’가 추진된다. 계열사 별 노조 활동으로는 사측과의 협상력을 최대로 뽑아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노조 컨트롤타워’를 구축해 대응하겠다는 전략이다. 문제는 가뜩이나 불안한 경영 환경 속에서 기업의 부담만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는 데 있다. 업계에서는 “노조와의 갈등이 삼성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005930) 제5노조인 디바이스경험(DX) 노조와 삼성화재(000810) 리본노조, 삼성디스플레이 열린노조,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상생노조 등 삼성 관계사 노조 4곳은 최근 통합과 함께 삼성그룹 노조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른바 ‘초(超)기업 노조’다.
이들은 각 노조 별로 삼성그룹노조의 구체적인 설립 취지와 계획 등을 조합원들에게 공유하면서 의견을 취합하고 있다. 삼성그룹노조 측은 현재 함께하기로 한 4개사 노조뿐 아니라 노조가 설립되지 않은 또 다른 4개 계열사도 노사협의회 차원에서 합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삼성 관계사 노조들이 연대 형태가 아닌 통합된 노조 설립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삼성그룹 노조는 노조별 통합 찬성을 묻는 조합원 총회를 진행한 뒤 이르면 내년 1월 초 공식 출범할 계획이다.
이들은 조합원들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노조 설립 시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상위단체에 가입하지 않고 정치적 구호 없이 조합원의 권익에만 집중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자칫 힘을 키운 노조가 조합원 이익 외 활동으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것이다.
노조 측에 따르면 통합 시 삼성그룹 노조의 조합원 수는 각 조합원 수를 합산해 1만 3000명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삼성 관계사 노조 중 최대인 전국삼성전자노조 9300여 명을 뛰어넘는 규모다.
삼성그룹노조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결성 이유로 ‘협상력 극대화’를 들었다. 노조 관계자는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협상 전략을 단일화한 뒤 계열사 개별 협상을 통해 교섭 우위를 이루고 있다”며 “우리도 이에 대응해 중앙 집중 형태로 힘을 모으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통합 노조를 구축한 뒤 단체협약 체결 권한을 삼성그룹 노조 집행부에 일임하고 계열사별 교섭에 직접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현재의 개별 노조는 지부 형태로 참여해 삼성그룹노조의 운영위원회 멤버로 참여한다. 이들은 노동조합법이 기업 단위가 아닌 경우에도 설립 신고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설립에 대한 법률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국내 최고 수준의 임금을 받는 삼성 직원들이 ‘밥그릇 챙기기’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비상경영으로 생존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조와의 협상에 끌려다니며 힘을 분산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그룹노조 출범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경영 환경에서 노조 리스크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노조가 모호한 법 규정을 이용해 몸집을 키운 뒤 회사를 상대로 과도한 요구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다.
삼성이 계열사별로 개별 교섭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그룹 노조가 교섭대표권을 얻어 교섭에 나서면 계열사 실적과 관계없이 동일한 임금 인상률이나 성과급을 요구하는 등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내걸 수 있다.
일례로 삼성디스플레이·삼성생명 등 한국노총 소속인 삼성 12개사 노조는 지난해 삼성그룹노조연대를 이뤄 공동 교섭을 요구하면서 ‘전 관계사 임금 공통 10% 인상’ 등 과도한 조건을 내걸어 논란을 빚었다. 이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주도해 그룹 차원의 교섭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표성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삼성그룹 노조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참여 기업이 전체 63개 계열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4개사 노조만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성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직원 사이에서는 통합 노조 추진이 사내 다른 노조와의 갈등을 부풀릴 수 있다며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공정거래법에서 대기업집단을 규정한 것은 공정거래 감시를 위한 차원이지 노조와의 협상 기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기업 입장에서는 노조가 목소리를 더 크게 내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라 가뜩이나 어려운 경영 환경 속에서 부담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