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원 중국특별위원회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최혜국 대우를 박탈하고 중국 레거시 반도체의 글로벌 시장 장악을 막을 ‘긴급 조치’를 촉구하는 내용 등을 담은 대중(對中) 정책 종합 보고서를 공개했다. 대부분이 미중 경제 관계는 물론 글로벌 무역 질서의 전면적 전환이 불가피한 제안이라 실제 입법으로 이어질 경우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올해 1월 미 의회에 구성된 중국 특위는 중국의 경제·기술·안보 등을 조사하고 정책 권고를 하는 초당적 협의체다.
특위가 12일(현지 시간) 내놓은 보고서는 △대중 경제 관계 재설정 △미국의 자본·기술 흐름 차단 △선도 기술 투자 및 동맹 협력 강화의 3개 축으로 구성되며 통상 및 투자 제한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모두 130개에 달하는 입법 규제 제안을 담고 있다.
올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중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양국의 군사 채널을 복원하는 등 관계 회복의 초석을 놓았음에도 미 정치권에서는 중국과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커진 셈이다.
이번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국에 대한 WTO 최혜국 대우를 배제하고 중국을 새로운 범주에 넣으라는 제안이다. 최혜국 대우는 WTO의 규정에 따라 두 국가 간 무역 관계에서 제3국에 부여하는 모든 조건보다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해주는 것을 말한다. 최혜국 대우 박탈은 결국 중국산 제품에 대해 더 많은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는 의미다.
마이크 갤러거 특위 위원장은 “중국은 WTO에 가입했을 때와 미중 간 정상적인 무역 관계를 맺었을 때의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며 “그 결과 우리는 중국이 무기화할 수 있는 핵심 분야에서 위험할 정도로 의존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위는 또 중국의 WTO 가입과 함께 도입됐다가 2013년 폐기된 ‘421조 세이프가드’ 재도입도 주장했다. 해당 규정은 WTO 회원국들이 국내 시장을 교란하는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불공정 무역 관행을 입증할 필요 없이 관세를 인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국은 2009년 버락 오바마 정부 당시 중국산 타이어에 무역법 421조를 적용해 긴급보호관세를 부과한 바 있다.
보고서는 아울러 미국이 중국과의 전쟁에 대비한 ‘비상 계획’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며 미국이 동맹국과 함께 중국에 심각한 외교·경제적 비용을 부과하기 위한 전략을 개발할 것을 권고했다. 이 연장선에서 미국 은행들이 중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주도의 ‘스트레스테스트’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특위는 “연준이 미중 간 갈등이 발생할 경우 중국 금융회사에 대한 제재가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위는 상무부에 중국산 반도체에 대한 관세를 부과할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중국 레거시(구형) 반도체가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한 긴급 조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투자 분야에서는 국가 안보 위협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검토하는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의 중국 감독 권한 강화가 제시됐다. 규제 요구가 빗발치는 틱톡의 모회사 바이트댄스를 포함해 ‘외국 적대 세력’이 소유한 소셜미디어 회사의 경우 미국 내 지분 매각 및 사업 금지를 감수하도록 못박는 법안 도입도 제안했다. 대만·일본·영국 등 미국의 우방과 높은 수준의 새로운 무역협정을 맺고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해상 실크로드)에 맞설 글로벌 전략을 개발하라는 내용도 담겼다.
이번 보고서는 그간 미국 정치권에서 제기된 대중 강경책을 총망라한 것으로 실제 입법으로 이어지면 글로벌 경제 및 무역 질서에 대혼란이 예상된다. 실제로 미국 대형 유통 업체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는 소매산업협회는 이날 보고서와 관련해 우려를 표명했다. 협회는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상은 결국 미국 산업에 피해를 줄 것”이라며 “중국의 보복을 불러올 수 있다”고 반발했다.
특위는 그러나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 재설정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갤러거 위원장은 “어느 정도의 대가가 불가피할 수 있다”면서도 “중국의 종속국으로 미국을 보는 시각을 받아들이거나 자체적인 안보와 번영을 위해 일어서는 것, 미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