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자산 10억 원이 넘는 ‘부자’들이 46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의 부자들은 고금리로 부동산 시장과 자본시장이 모두 위축되자 부동산 자산을 줄이고 은행 예적금에 돈을 묻어둔 경우가 많았다.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고수익보다는 안정적 투자를 지향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지속됐던 긴축의 끝이 보일 것으로 기대되는 내년부터 부자들은 주식 투자 금액을 늘리는 방향으로 투자 전략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7일 KB금융(105560)지주 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23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부자는 45만 6000명이었다. 2021년 말(42만 4000명)에 비해 7.5% 늘었으며 전체 인구의 0.89%를 차지하는 규모다. 하지만 이는 2019년 이후 가장 낮은 증가 폭이다. 부자들은 늘었지만 이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은 2747조 원으로 1년 전보다 4.7% 줄었다. 부자들의 금융자산 규모가 뒷걸음친 것은 2019년 이후 처음이다. 지난해 자본시장 상승세가 꺾인 탓으로 풀이된다.
지역별로는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부자 10명 중 7명(70.6%)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내에서는 강남·서초·종로·용산구의 부 집중도가 높았고 성동구가 처음으로 부집중도지수 1.0%를 초과했다.
올해 한국 부자들의 자산은 평균적으로 부동산 56.2%, 금융자산 37.9%로 구성돼 있었다. 지난해보다 각각 비중이 0.3%포인트, 0.6%포인트 줄었다. 부자들의 부동산 자산 비중의 경우 2년 연속 감소한 것으로, 이는 보고서 작성을 시작한 2011년 이후 처음이다. 세부적으로 거주용 부동산(30.0%), 현금 등 유동성 금융자산(13.3%), 빌딩·상가(11%), 거주용 외 주택(10.3%), 예적금(9.9%) 순으로 자산 비중이 높았다. 이 중 거주용 부동산과 예적금 비중이 1년 전보다 늘었고 주식·리츠·상장지수펀드(ETF)와 토지·임야, 유동성 금융자산, 거주용 외 주택은 줄었다. 금리 인상과 주택 경기 냉각, 증시 침체 등이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보유율이 가장 높았던 자산은 예적금(94.3%)이었다. 전년 대비 9.8%포인트나 늘었다. 투자시장이 모두 위축된 상황에서 고금리 예금 판매가 증가한 영향으로 보인다. 만기 환급형 보험이 지난해보다 3.0%포인트 증가한 87.5%로 뒤를 이었다. 반면 주식 보유율은 75.5%로 전년보다 1.8%포인트 감소했고 거주용 외 주택(55.3%)도 같은 기간 1.0%포인트 감소했다. 수익 경험이 줄며 투자 매력이 줄어든 까닭이다. 응답자들 중 거주용 부동산과 거주용 외 부동산에서 지난 1년간 수익을 경험한 사례는 각각 18.5%, 17.5%였다. 전년 대비 24.0%포인트, 16.5%포인트씩 줄었다.
부자들의 투자 성과는 자산이 많을수록 좋았다. 금융자산 ‘50억 원이상’에서는 수익을 경험한 사례(25.0%)가 손실을 경험한 사례(12.5%)보다 12.5%포인트 비중이 높았고 총자산 ‘100억 원이상’에서도 수익을 경험한 사례(29.7%)가 손실을 경험한 사례(9.4%)보다 20.3%포인트 많았다. 부자들의 안정 지향적 투자 성향도 강해졌다. 투자 원금의 손실 위험을 최소화하고 예적금 수준의 수익률을 기대하는 ‘안정 추구형’과 ‘안정형’ 비중의 합은 51.6%로 전년보다 1.0%포인트 증가했다. 반면 손실을 감내하고 고수익을 추구하는 ‘적극 투자형’과 ‘공격 투자형’ 비중의 합은 지난해 22.3%에서 올해 20.0%로 2.3%포인트 줄었다.
다만 내년 투자 계획에서는 보다 공격성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앞으로 1년간 예적금 투자 금액을 늘리겠다는 부자가 24%로 여전히 가장 많은 가운데 주식 투자를 늘리겠다는 응답자도 21%나 됐다. 주식 투자를 줄이겠다는 응답자가 더 많았던 지난해와 대비된다. 내년 고수익이 예상되는 투자처로는 주식(47.8%)과 거주용 주택(46.5%)이 꼽혔다. 금리 고점이 확인되면 채권 투자를 늘린다는 경우도 있었다.
향후 3년 정도의 중장기적으로 고수익이 기대되는 유망 투자처로는 거주용 주택(44.3%), 주식(44.0%), 거주용 외 주택(32.3%), 금·보석(32.0%)을 선택했다. 금·보석은 주식과 함께 지난해 조사에서 후순위였는데, 대내외 경기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자산가치 하락의 위험이 적은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한국의 부자들은 예술품과 디지털자산 투자에는 부정적이었다. 예술품과 디지털자산에 부자의 절반 이상인 각각 55.8%, 62.5%가 ‘투자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투자한 경우에도 수익이나 손실이 발생한 사례는 5% 미만에 불과하고 대부분 특별한 수익이나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다.
부자들이 꼽은 부의 원천은 사업소득이 31%로 가장 비중이 컸으나 전년 대비 6.5%포인트 줄었다. 뒤이어 부동산 투자가 0.8%포인트 감소한 24.5%, 상속·증여가 4.2%포인트 늘어난 20%로 나타났다. 금융투자와 근로소득은 각각 2.8%포인트, 0.3%포인트 늘어난 13.3%, 11.3%로 집계됐다. 부자들은 부의 원천이자 성장의 기초인 ‘종잣돈’으로 최소 8억 원 정도를 생각했으며 총자산 100억 원 이상을 가져야 부자라고 생각하는 비중은 절반(53%)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