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판교에 위치한 정보기술(IT) 회사에서 근무하는 서경제(가명·37) 씨는 최근 3년새 체중이 17kg 늘었다. 키가 175㎝인 서씨는 대학 졸업 이후 10년 가까이 73㎏ 전후의 체중을 유지했다. 몸무게(㎏)를 키의 제곱(m²)으로 나눈 값인 체질량지수(BMI)는 23.8㎏/㎡. 정상 범위를 살짝 벗어나지만 뚱뚱하다는 소리를 들은 정도는 아니라 여겼고 ‘마음만 먹으면 2~3㎏ 정도는 금방 뺄 수 있다’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혼자 산지 15년차로 자칭 ‘자취 만렙’인 서씨는 아침식사를 거른지 오래다. 평일 점심과 저녁, 2끼는 대부분 외식으로 해결했다. 혼자 밥을 차려 먹기 귀찮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두 세번은 퇴근 후 저녁식사를 빙자한 술자리를 가졌다. 몸이 무거워진다 싶을 때쯤 집근처 헬스장을 찾아 러닝머신 위에 오르는 게 서씨의 유일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 기간 재택근무에 돌입하며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자 활동량이 더욱 줄었다.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횟수가 늘면서 체중계의 숫자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더니 급기야 앞자리 수가 바뀌었다. 현재는 체중 90㎏, BMI 30㎏/㎡에 육박하는 고도비만 상태다. 특히 복부에 집중적으로 살이 찌면서 허리 둘레가 40인치로 올라섰다. 건강검진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매년 조금씩 오르던 최고혈압은 150㎜Hg대가 됐고 총콜레스테롤은 250㎎/㎗을 넘어 고콜레스테롤혈증 의심 소견이 나왔다. 공복혈당은 110㎎/㎗로 아직 당뇨병은 아니지만 정상 범위를 벗어난 단계다. ‘내년 1월부터 헬스장에 다시 등록하자’고 다짐해 보지만 최근에는 조금만 걸어도 무릎이 붓고 아파 러닝머신 위에서 몇 분이나 걸을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놓쳐 버린 건강관리,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서씨처럼 갑자기 불어난 체중과 함께 각종 건강지표가 악화된 20~30대가 흔하다. 최근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작년 기준 19세 이상 성인 남성의 비만 유병률은 47.7%로 전년 46.3%보다 1.4%포인트 높아졌다. 비만 유병률은 BMI가 25㎏/㎡ 이상인 분율을 뜻한다.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30대가 55.7%로 가장 높았고 40대(53.6%), 50대(49.7%) 순으로 나타났다. 30∼50대 남성 2명 중 1명은 비만이란 얘기다. 여성의 비만율은 25.7%로 전년 26.9%보다 1.2%포인트 낮아졌다. 다만 20대의 경우 18.2%로 전년보다 비만율이 2.3%포인트 올랐다.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세계보건기구(WHO)가 ‘21세기 신종 감염병’으로 규정할 정도로 비만 유병률이 증가하면서 세계 각국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며 “우리나라 역시 최근 10년간 남성의 비만율이 크게 뛰었다. 특히 코로나19를 겪으며 소아청소년과 성인의 비만율이 급증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국내에서 손 꼽히는 비만 치료 전문가다. 1996년에 비만 치료를 시작할 때만 해도 미용으로 오해를 받을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비만 유병률이 낮았다. 30년 가까이 지나며 ‘비만=질병’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고 국내에서는 2019년부터 BMI 35㎏/㎡ 이상 또는 BMI 30㎏/㎡ 이상으로 고혈압·제2형 당뇨·이상지질혈증 같은 대사질환을 가진 경우 비만대사수술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도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비만인들에게 병원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강 교수는 “BMI가 높다고 모두 병원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라면서도 “비만이 심하고 오래된 환자일수록 의료진의 도움 없이 개인의 의지만으로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대사 관련 질환은 물론 수면무호흡증·통풍·천식부터 관상동맥질환·뇌졸중·골관절염·대장암·유방암 등에 이르기까지 일반인이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질병은 비만과 연관된다. 반면 체중을 5~10%가량 줄이는 것 만으로도 대다수 질환의 위험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의학계에서는 적극적인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도 비만’이라는 용어 대신 ‘병적 비만(Morbid Obesity)’으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강 교수가 비만 환자를 치료할 때 내세우는 첫 번째 원칙은 “환자에게 답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사를 만나도 24시간 전담 케어를 받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환자가 진료실을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살찌기좋은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면 체중감량 후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요요현상’을 피하기 힘들다.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가 13kg을 감량해 ‘비만 치료의 게임체인저’라고 불리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 작용제조차 주사를 중단하면 요요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됐다.
병원 문턱을 넘기까지 마음 고생이 심했을 환자들에게 가능한 빨리 많은 양의 체중을 감량하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할까. 그런 환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강 교수는 비만을 유발한 근본 원인을 찾는 데 집중한다. 개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형 치료계획을 수립해 일상생활 속 행동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간헐적 단식’을 위해 아침을 거르고 늦은 시각 폭식으로 이어진다면 무슨 소용일까. 유행하는 다이어트의 효과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개인의 생활 패턴과 맞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란 얘기다. 조금만 대화를 나눠보면 환자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게 된다. 몇몇 환자들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식사 메뉴를 찍어오게 하는 것 만으로도 식습관 개선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약물의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도 있지만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생활습관 개선을 3개월 이상 시행해도 체중이 꿈쩍하지 않거나 심혈관 위험인자가 1가지 이상 동반된 환자에서 저용량 처방을 고려한다. 뻔하다고 여겨질지 모르나 체중감량이 아니라 건강한 생활습관을 되찾아주는 게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디지털치료학회장으로 선출된 강 교수는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비대면 건강관리 서비스를 고도화하기 위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환자 스스로 살이 찐 원인을 납득한 다음 단계는 건강한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스마트폰 만보기앱으로 걸음 수를 체크하는 것 만으로도 동기부여가 가능하다” 며 “코로나19 이전의 라이프스타일을 회복하기 위한 신년 목표를 세워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