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은 낭만적이다. 아파트만 가득한 잘 구획된 서울 도심과 달리 여기저기 아무렇게 흩어진 단독주택 덕분이다. 게다가 아기자기한 집 안에 문인·화가 등 예술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방문객의 마음을 더욱 포근하게 만든다.
20일 서울경제신문이 ‘작가의 아틀리에’ 인터뷰를 위해 찾은 이진주 작가의 작업실도 헤이리마을에 위치해 있다. 전화를 걸어 도착 소식을 알리자 작은 현관문에서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입은 작가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작가는 “이곳은 집이면서 작업실”이라며 1층 첫 번째 작업 공간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이진주는 극강의 검은색 바탕에 손과 얼굴 등 조각난 신체 일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 자세히 묘사한 ‘블랙 페인팅’ 시리즈로 주목을 받는 40대의 젊은 작가다. 이곳 1층 작업 공간은 그의 작품의 핵심인 ‘블랙’, 바로 ‘이정배 블랙’이 탄생한 곳이다. 이정배는 작가의 남편이자 산수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설치미술가다. 1층 작업 공간은 두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마치 목공소처럼 커다란 나무토막과 기둥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는 곳이 이정배의 작업 공간이다.
이정배의 작업 공간은 작가의 작품에 매우 중요하다. 이진주 작품을 대표하는 특징은 크게 ‘극강의 블랙’과 ‘철판처럼 얇은 화판’ ‘사진보다 더 세밀한 신체 묘사’로 설명할 수 있다. 그중 색과 화판 두 가지를 부부가 함께 작업한다. 먼저 색에 대해 질문했다. ‘왜 이렇게까지 흑색보다 더 어두운 흑색을 사용하는지, 그리고 이런 흑색 물감은 어떻게 만드는지’를 물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작가는 “이정배 블랙의 시작을 설명하려면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2015~2016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초기 육아 시절에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낄 시간도 잘 주어지지 않는다. 비통함이라는 감정이 육체 밖으로 나올 시간도 사치로 느껴질 만큼 쏜살같이 지나가고 슬픔은 배경음악처럼 육아 뒤에 깔린다. 작가 역시 그랬을지 모른다. 그는 “당시의 작품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색이 없는 바랜 이미지로 그려지는 일이 많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던 이정배는 어느 날 “당신 작품의 검은색은 수많은 사건을 뒤덮고 있는 검은색”이라며 “극강의 검은색을 보여주는 게 당신의 개념과 맞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극강의 블랙’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1층 작업실은 극강의 블랙을 만든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다. 책상 이곳저곳에는 서로 다른 채도의 검은색이 칠해진 헝겊이 널브러져 있고, 벽에는 다른 검은색 배경 속 같은 대상을 그린 작품이 걸려 있다. 계속해서 검은색을 칠하고 또 칠하는 모양새다.
작가는 ‘물감을 만드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질문을 던지자 “물감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영업 비밀”이라면서도 “검은색 농도는 안료에 어떤 바인더(접착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물감을 만드는 기본 구조를 설명했다. 그는 “아무리 채도가 높고 까만 물감 가루가 있어도 바인더가 색을 가린다”며 “이정배 블랙은 제일 적합한 가루와 접착제를 찾아 가장 적절한 수준으로 배합하는 일을 반복한 끝에 탄생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정배 블랙을 칠하기 전의 작품과 칠한 후의 작품을 보여줬다. 같은 대상을 그린 그림인데도 전혀 다른 사물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배경의 채도가 이렇게 작품을 차이 나게 만든다”며 물감의 중요성에 대해 귀띔했다.
이진주 작품의 화판은 옆에서 살짝 보면 철판처럼 얇다. 얇은 판에 검은색을 칠한 것으로 알았는데 아니다. 측면에서 화판을 사선으로 깎아내 마치 얇은 판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날카로운 화판 위에 놓인 극강의 블랙은 그림 속 대상을 더 선명하게 한다. 이 화판의 아이디어를 낸 이도 이정배다. 작가는 “이정배는 자신의 전시뿐 아니라 나의 전시에도 많은 생각을 제시하고 공유한다”며 “‘이정배 블랙’처럼 아내의 작품이 빛날 수 있는 많은 방법을 찾아내 도움을 준다”고 밝혔다.
‘이정배 블랙’과 ‘얇은 화판’이 작품을 구성하는 외관이라면 작품 속 이미지는 철저히 작가의 오래된 사유에서 나온다. 그의 작품 속 대상은 오묘하고 신비롭다. 서로 맞잡은 두 손, 살짝 끌어안고 있는 두 여성의 목덜미 등 신체의 파편을 포착해 털 한 올까지 헤아릴 정도로 자세히 묘사한다. 작가가 이 같은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기원에는 역시나 가족이 있다.
그는 “아이가 어릴 때 신종플루에 걸려 간호를 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는데, 아이 얼굴을 뒤덮고 있는 솜털의 물결이 보였다”며 “어떤 사물을 시간을 들여서 오랫동안 관찰하고 응시할 때 비로소 다가오는 장면을 좀 더 강렬하게 경험했다”고 설명했다. 그때부터 작가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미 존재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그리지만 그리는 시간은 누구보다도 오래 걸린다. 그림이 되기 전, 그리고 싶은 대상을 면밀하게 오랫동안 감상하고 관찰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 속에서 더 많이 촉수를 열어두고 살아야 한다. 작가는 “일상의 것을 그린다는 것은 보지 못하면 그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며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싶은 대상과 그리고 싶은 순간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기자는 작가의 많은 작품 중 ‘오목한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 ‘이정배 블랙’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화분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마치 이 시대의 모든 엄마, 워킹맘을 대변하는 듯 처연하다. 주변에 아무렇게나 놓인 텅 빈 화분은 쉼 없이 바쁜 삶 속에 공허한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작품은 작가가 2014년부터 3년간 그린 크기 120x240㎝의 대작이다.
2014년은 대한민국 모두에게 슬픈 해였다. 커다란 배가 진도 앞바다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모습을 온 국민이 라이브로 목격한 해다. 세월호와 부친상까지 이어지는 슬픔의 과정에서 작가는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한다. 그림 속 화분은 사실 텅 빈 게 아니라 식물이 죽은 화분이다. 작가는 “아이를 키우면서 어마어마한 시간의 속도와 유한성이 거칠고 아프면서 아름답게 다가왔다”며 “‘오목한 노래’는 그러한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철학은 아마도 3층 작업실에서 나오는 듯했다. 주택의 2층은 가족의 주거 공간이며 1·3층이 작업실이다. 작가는 3층 작업실을 ‘어른들의 놀이터’라고 표현했다. 3층에서 부부 혹은 부부의 지인들이 모여 예술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정배 블랙’과 같은 획기적인 예술품이 나오기도 하고, 전시 기획을 하기도 한다.
두 사람은 총 3층으로 이뤄져 있는 이 작업 공간을 5년 전 직접 건축했다. 작가는 “예술가이자 부모이기 때문에 최대한 어떻게 하면 그 둘을 잘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물”이라며 “아이들이 바쁜 작업 시간 중 끼어들어 같이 있을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집중력을 더 많이 끌어올려야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과 하는 삶이 또다시 작업의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에 선순환 구조를 이룬다는 의미다.
추상이 미술 시장의 주류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이진주의 작품은 사진보다 더 극적으로 사실적이다. 작가는 앞으로도 자세하게 인물과 사물을 묘사하는 작품 세계를 계속 이어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현실은 드라마틱하고 극적이다. 나는 그런 기이한 순간에 주목하고 싶다”며 “평범한 듯한 대상이어도 극적인 순간이 느껴지는 대상이라면 언제든지 제 작업 속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