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
미국의 허먼 멜빌이 1851년에 쓴 소설 ‘모비딕’에서 신중하고 현명한 1등항해사 스타벅이 한 말이다. ‘모비딕’은 거대한 고래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뒤 복수를 위해 추적하는 에이햅 선장의 처절한 혈투를 그린 소설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해 8월 법무부 장관 재직 시절 신임 검사 강연에서 올바른 소신을 지키려면 실력을 갖춰야 한다면서 스타벅의 말을 소개했다. 만용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 믿을 수 있는 용기는 위기를 정확히 진단하는 데서 나온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한 위원장은 ‘펠로폰네소스전쟁사’라는 책을 들고 유럽 출장에 나서는 등 책 읽기를 좋아한다. 좋은 검사의 필수 조건에 대해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하는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는 그때그때 상황에 적확한 구절을 자주 인용하며 유려한 언변을 구사한다. 그는 지난달 “여의도 사투리가 아니라 5000만 명이 쓰는 문법을 쓰겠다”면서 기성 정치권과 차별성을 분명히 했다. 자신의 정치 경험 부족이 거론되자 루쉰의 단편 소설 ‘고향’의 한 대목을 인용해 “많은 사람들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라고 받아넘겼다.
한 위원장은 26일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을 통해 특유의 말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는 자신의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이재명 대표의 더불어민주당이 운동권 특권 세력과 개딸 전체주의와 결탁해 나라를 망치는 것을 막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선당후사(先黨後私)가 아니라 선민후사(先民後私)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고 ‘동료 시민’이라는 단어를 열 차례나 언급했다. “공포는 반응이고 용기는 결심”이라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명언도 꺼냈다.
기성 정치권의 때가 묻지 않은 50세 새내기 정치인이 화려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거대 야당을 강하게 때리자 상당수의 보수 성향 ‘동료 시민’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고 있다. 뛰어난 웅변술로 진보·좌파를 겨냥해 말펀치를 날리는 정치인이 적었던 보수 진영에서는 ‘사이다’ 같은 발언으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근사한 말이 국민을 설득시키고 공감과 신뢰를 얻어내려면 세 가지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우선 말이 일관된 실천으로 이어지는 언행일치를 보여야 한다. ‘선민후사’를 내세웠으니 ‘윤심(尹心)’ ‘당심(黨心)보다 ‘민심(民心)’을 무섭게 생각하면서 낮은 자세로 국민의 삶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선민’을 외치고도 진영과 당,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를 한다면 ‘NATO(No Action Talking Only)’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밖에 없다.
둘째, 지도자의 말은 정책 수립과 집행을 거쳐 구체적 성과로 나타나야 한다. 진정 국민과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정치를 복원하고 정교한 정책으로 경제를 살리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한 위원장의 이번 연설에서는 집권당 수장에게 걸맞은 비전과 정책 제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공정한 경쟁 보장’ 등 두어 가지 정책 방향에 대해서만 운을 뗐을 뿐이다.
셋째, 신뢰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한 위원장이 주장하는 메시지와 다른 행태 또는 도덕적 흠결이 여권에서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를 정의로울 것”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조국 사태 등으로 공정과 정의가 무너진 게 확인되자 문재인 정권은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을 받고 정권을 내주게 됐다.
문재인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한 위원장이 집권 세력 내에서 특권과 비리가 존재하지 않도록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특히 ‘용기’라는 말을 즐기는 그는 윤석열 대통령 등에게도 할 말을 하는 결기를 보여줘야 한다. 야당이 밀어붙인 ‘김건희 여사 특검법’과 관련해서도 특별감찰관제 가동을 포함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한 위원장이 “초현실적인 민주당”이라고 비난했는데 국민의힘이 똑같은 소리를 듣지 않도록 뼈를 깎는 쇄신을 해야 할 것이다. 스타벅은 고래를 두려워하면서도 선장에게 할 말을 하는 인물이었다. 한 위원장도 국민을 무서워하면서 여권의 위기를 직시하고 야당뿐 아니라 ‘용산’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에 첫발을 뗀 그의 길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면서 넓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