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코노미'의 해…韓 앞에 놓인 '아일랜드-이탈리아' 두 개의 갈림길

[2024 신년기획-결단의 해, 시작된 경제전쟁]
<1> 퇴보와 도약의 갈림길 - 격랑의 세계·위기의 한국
70여국서 선거…글로벌 경제 요동
친기업 협력 '고성장' 아일랜드냐
포퓰리즘 득세, 침체늪 빠진 伊냐
韓 구조개혁 성공·실패 갈림길에

2024년 갑진년은 한국의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와 미국 47대 대통령 선거를 비롯해 전 세계 76개국에서 선거가 예정된 '슈퍼 정치의 해'다. 세계사적 전환의 시기 생존 전략을 구축할 때다. 국회가 국민과 경제계 목소리에 귀 기울여 대한민국의 미래전략을 설계하는 역할을 하기 바라며 유권자의 선택을 의미하는 점 복(卜)자와 제22대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예비 후보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방식으로 구성했다. 오승현 기자

11월 방문한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의 ‘도크랜드’. 아일랜드의 실리콘밸리라는 이 지역에는 구글·야후·애플·인텔·페이스북·화이자 등 글로벌 기업 간판이 즐비했다. 2011년 유로존 재정위기 당시만 해도 포르투갈·그리스 등과 함께 경제위기의 원흉인 피그스(PIIGS)로 지목됐던 아일랜드는 올해 법인세 수입이 220억 유로(11월 누적 기준)로 1년 전보다 4.2% 증가했다. 글로벌 경제위기 와중에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것이다. 이는 올해 법인세수(76조 1000억 원, 10월 누적 기준)가 전년 대비 23.7%나 감소한 우리와 비교해도 차이가 확연하다.


아일랜드를 유럽 최고 부국으로 탈바꿈한 배경에는 정치가 있다. 초당적 협력을 통해 법인세를 내리고 기업 유치에 전력투구한 결과 2000년대 이후에도 평균 5% 이상 고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이탈리아는 정경유착, 부패한 정치 파벌, 공익은 뒷전인 포퓰리즘 난무로 정치가 경제의 짐이 되고 있는 대표 국가 중 하나다. 이탈리아가 피그스의 멤버였다는 점에서 아일랜드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특히 신년은 한 나라의 운명뿐만 아니라 국제질서까지 송두리째 바꿀 선택의 해다. 우리를 비롯해 70여 개 국가에 선거가 있다. 전광우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전 세계 모든 국가의 내년 화두는 경제 회복”이라며 “경제 활력을 되찾아야 국민 선택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포퓰리즘도 극심할 것”이라고 짚었다. 김흥종 고려대 국제대학 특임교수는 “대외 의존형 경제인 우리나라로서는 선거 결과에 따라 변화할 글로벌 경제 질서에 맞춰 제대로 응전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경제신문은 지난 2개월여 동안 유럽(영국·아일랜드), 아시아(인도·일본), 미국 등을 둘러봤다. 글로벌 긴축 속에 경제 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각국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40개국·40%·40억명 '아마겟돈 선거'…글로벌경제 새판 짠다



2024년 전 세계 76개국에서 선거가 예정돼 있다. 전국 단위 선거만 ‘40여 개국’에서 실시된다. 세계 인구 10위권 국가 중 8개국(인도·미국·인도네시아·파키스탄·방글라데시·러시아·멕시코·일본)이 선거를 치르면서 전 세계 인구 절반 이상인 ‘42억 명’이 유권자로 등록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중 절반이 투표장을 찾아도 20억 명이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다.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 합계의 42%(44조 2000억 달러)가량을 차지하는 국가가 일제히 선거로 들썩일 수 있다는 얘기다.


4월 총선이 예정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가 던지는 위험’이라는 책의 저자인 에이미 제가트 스탠퍼드대 정치학 교수는 “2024년은 앞으로 인류의 역사를 결정짓는 데 매우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라며 “선거를 통해 게임의 규칙, 금리, 시장의 움직임, 정부 규제, 정책 등 모든 것이 바뀌며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타격 또한 매우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말 그대로 아마겟돈 선거, ‘결단의 해’가 개막된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24년 세계경제를 전망하기 앞서 주요 변수로 ‘선거’를 꼽은 배경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무역협회도 최근 세계경제통상전망 세미나에서 내년을 ‘슈퍼 선거의 해’로 규정했다.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경제정책이 뒤틀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은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포퓰리즘 정책을 내놓기 때문이다. 이필상 서울대 특임교수는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은 경제를 정치 희생물로 만든다”며 “반시장적 법과 제도에 묶여 경제가 자생 기능을 잃게 된다”고 지적했다.


대만 등 40개국서 전국단위 선거…11월 5일 美 대선이 최대 분수령

최대 분수령은 내년 11월 5일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폐기될 수 있다. 이로 인해 청정에너지 투자가 축소되면 미국의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패널, 풍력발전 생산 시설에 투자한 한국 기업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은 “트럼프는 세계무역기구(WTO) 탈퇴와 자동차 산업 노동자 보호를 위해 그린뉴딜 중단도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며 “중국이나 외국 등 모든 나라에 10% 관세를 매긴다는 발언도 다른 나라에서 세금을 걷어 미국을 더 잘살게 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의 재선 시) 민주주의와 세계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봤다.



미국 공화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19일(현지 시간) 아이오와주 워털루에서 유세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년 벽두 대만 총통 선거도 어떤 식으로든 지정학적 리스크를 자극할 것이다. 반중 성향 민진당 라이칭더 부총통이 당선된다면 양안 갈등은 더욱 첨예해지고 덩달아 트럼프와 조 바이든 간 대선 레이스에서 반중국 경쟁은 더욱 심화할 수 있다. 국민당 허우유이 후보가 승리하면 미국의 중국 고립 정책은 더 노골화돼 우리의 선택에 변수가 될 것이다.


트럼프 재집권시 글로벌질서 격변…보호주의·경제 블록화 심화 우려

이 밖에 내년 5월에는 중국 공급망을 대체할 아시아 주요 14개국인 ‘알타시아’의 핵심 국가로서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는 인도가 하원 선거를 치르고 6월은 유럽의회 선거, 9월에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교체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런 미증유의 변화가 예정돼 있음에도 한국 정치권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나라’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원재 경제평론가는 “지구촌 선택의 결과에 따라 뉴노멀이 만들어지지만 우리 정치권을 보면 이런 변화에 대한 준비는커녕 사실상 영구 선거전(퍼머넌트 캠페인)에 빠져 상대가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하는 수렁에만 빠져 있다”고 평가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 시간) 위스콘신주 밀워키미첼국제공항에서 백악관으로 출발하기 전 베네수엘라와의 수감자 맞교환 합의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의 고립주의와 중국·러시아의 반격으로 보호주의와 경제 블록화 현상은 고착될 것으로 보인다. 점진적인 경제 회복이 엿보이지만 미중 간 긴장과 보호주의 강세는 교역에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올해 세계 무역 규모는 1년 전보다 4.65%(유엔무역개발회의 기준) 감소했는데 내년에는 이런 추세가 더 가팔라질 수 있다. 무역에 절대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경제평론가는 “정치가 경제를 흔들고, 경제가 정치를 판가름 짓는 폴리코노미가 국가를 가리지 않고 덮칠 수밖에 없다”며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韓, 14년째 잠재성장률 추락…"말만 혁신, 아무것도 안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잠재성장률이 2011년(3.8%)에서 내년(2.0%)까지 14년 동안 한 번도 반등하지 않고 줄곧 추락한 유일한 국가다. 이 사실이 뼈아픈 것은 제대로 된 구조 개혁이나 변화가 없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경제는 속병이 단단히 들었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이르면 우리나라가 2031년부터 0%대 성장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40년대 0%대 성장률을 예고한 것도 충격이었는데 이보다 10년은 더 빠른 속도다. 심지어 골드만삭스는 2060년대부터 한국 경제가 뒷걸음질을 치다가 2075년이 되면 파키스탄이나 필리핀에도 따라잡힐 것으로 봤다.


중장기적인 성장률 둔화 흐름은 단기 성장률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OECD가 11월 내놓은 경제 전망에서 2025년 성장률이 2024년보다 낮은 국가는 회원국 38개국 중 한국과 멕시코 두 곳뿐이다. 2025년 기준금리를 연 2.50%로 현 수준보다 1%포인트 인하할 것으로 보면서도 성장률을 낮춰 잡은 것이다. 재정·통화정책으로는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없는 구조적 침체가 반영된 결과다.




문제는 구조적 침체를 벗어날 만한 어떤 구체적 움직임, 위기의식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 회복의 주체가 돼야 할 기업은 반기업 정서, 생산성 역행을 방치하는 노조 등에 막혀 도약의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실제 기업 투자를 이끌 규제 개혁, 세제 지원 등은 상투적인 균형 발전 논리와 부자 감세 프레임에 번번이 좌절돼왔다.


통상 기술 진보 등을 통해 가능하다는 총요소생산성의 성장 기여도는 2020~2022년 0.2%포인트까지 떨어졌다. 1991~2010년만 해도 2.0~2.1%포인트였던 수치가 추락한 것이다. 2010년대 이후에는 OECD 평균보다도 생산성 성장률이 낮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 번 꺾인 생산성이 다시 높아지려면 새로운 기업이나 산업이 등장하면서 효율성이 확 높아져야 하는데 (기업에 호의적이지 않는 일각의) 사회 분위기, 단기 실적에 급급한 기업 경영, 산업 구조조정에 눈감은 정치권이 합쳐지면서 이제는 (기업들이) 해외로 나갈 생각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생산성 기여도 0.2%P까지 추락…재정·통화정책으론 성장회복 한계

2024년마저 구조 개혁 없이 지나간다면 저성장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 생산연령인구(15~64세) 비중이 70.7%로 전년(71.1%) 대비 줄어들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2025년은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이 20.3%를 넘어서면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원년이다. 국가소멸론까지 나올 만큼 사회 전반의 활력이 떨어진 상태라 파격적인 정책이 절실하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출생률 감소, 기후위기 등 여러 난제를 맞닥뜨린 시대에 선도적 어젠다를 선정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육성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기초과학 및 응용과학 사업화를 지원하고 최고 수준의 과학자를 양성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책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대론 2031년부터 0% 성장 직면…급속 쇠퇴 막기 위한 특단책 절실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각성을 주문하고 있다. 대내외 악재로 한국 경제를 둘러싼 고충이 가중되면서 중장기적인 비전과 개혁 작업을 추진해도 모자랄 판에 극한의 대립과 정쟁 속에서 되레 나라를 궁지로 내몰고 있다는 것이다. 11조 원대 달빛고속철도, 지역사랑상품권 살포 등 난무하는 정치권의 총선용 포퓰리즘 경쟁이 생생한 실례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세수 감소에 따른 긴축 재정으로 재원의 안배가 중요한 해가 바로 2024년”이라며 “정치권의 (선심성 포퓰리즘 등) 후진적 행태가 계속된다면 한때 고속 성장으로 추앙받아왔던 한국이 이제 고속 쇠퇴, 고속 추락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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