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라.’
최근 한국무역협회가 펴낸 ‘2024년 글로벌 통상 환경 전망’ 보고서의 제목이다. 보고서는 전쟁 장기화, 미국 등 70여 개국에서 실시되는 선거와 리더십 교체, 미국·유럽연합(EU)과 중국 간의 공급망 분리, 보호주의 심화 등의 여파로 통상 측면에서 올해가 어느 때보다 어려운 해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더구나 국내외 대다수 연구기관은 올해 세계 경제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2년 동안 이어진 반등세를 마치고 새로운 둔화 국면에 진입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외 의존도가 70~80%에 이르는 우리 경제가 중대 도전에 직면한 셈이다. 일부에서는 글로벌 경제가 ‘피크아웃(고점 통과)’에 이어 ‘L자형 장기 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고물가·고금리 등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본격화하는 데다 경기 침체를 막을 수 있는 재정·통화 정책 수단이 고갈됐다는 이유에서다. 주요 2개국(G2)발 경기 하락,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 지정학적 불안, 기상 이변에 따른 물가 상승 등 세계 경제를 위기로 몰고 갈 각종 리스크들이 쌓여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지난해 3.0%(추정치)보다 0.1%포인트 낮은 2.9%로 전망했다. 이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의 역사적 평균(2000~2019년) 성장률 3.8%를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팬데믹 후유증과 지정학적 불안, 주요국의 통화 긴축 정책과 재정 지출 감소 등이 경기 회복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세계 교역 성장률은 3.5%로 지난해 0.9%보다 개선될 것으로 IMF는 내다봤다. 하지만 2022년의 5.1%보다 크게 낮고 지난해 7월 전망치보다 0.2%포인트 하향 조정된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은행(WB)의 올해 글로벌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각각 2.7%, 2.4%로 IMF보다 더 낮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당겨 쓴 여력, 압박 받는 성장’을 올해 키워드로 제시하며 세계 경제성장률을 2.8%로 전망했다. 코로나19 극복 과정의 금리 인상과 정부·가계 부채 증가 등 여파로 소비·투자 등이 줄고 있어서 지난해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도 “올해는 세계 경제가 ‘L자형 장기 저성장’에 본격 진입하는 해가 될 것”이라며 “지난해 예상되던 침체가 미뤄진 ‘이연된 침체’”라고 설명했다. 연구원은 “지난해 세계 경제는 미국 등 선진국 가계의 소비 지속, 중국 등 주요국의 경기 대응 재정 지출 등에 힘입어 우려했던 것에 비해 선전했다”며 “올해는 인플레이션 지속 우려에 금리를 조기에 크게 낮추거나 재정 지출을 적극 늘리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세계 경제가 코로나19 이후 물가 상승률은 한 단계 높아지고 성장률은 한 단계 낮아진 ‘고물가·저성장’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 연구원의 진단이다.
세계 경제 둔화는 신흥국보다 선진국이 주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IMF는 선진국의 성장률은 지난해 1.5%에서 1.4%로 소폭 내려가고 신흥국은 지난해와 같은 4.0%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의 성장률은 지난해 2.1%에서 올해 1.5%로, 일본은 2.0%에서 1.0%로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로존 역시 지난해 0.7%에서 올해 1.2%로 올라서겠지만 1%대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통화 긴축 정책과 고물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따른 에너지 비용 상승이 유로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브라질·러시아 등 주요 신흥국들의 경우 성장률이 낮아지겠지만 급락은 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인도·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은 5% 이상의 고성장이 예상된다. 이 같은 신흥국 경제의 선전에 힘입어 세계 경제가 침체하더라도 강도는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G2발 리스크 등 글로벌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이다. 가장 큰 하방 리스크는 미국 등 선진국의 고금리 장기화 가능성이다. 현재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최대 우려 사항은 고물가 지속이다. 이 때문에 경기가 급랭하기 전까지는 ‘피벗(통화정책 방향 전환)’을 주저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로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인하하더라도 올해 2분기에나 시작하고 올 연말까지 인하 폭도 1%포인트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고금리가 장기화하면 코로나19 이후 불어난 막대한 민간·공공 부채와 맞물려 주요국의 내수 둔화, 신흥국의 자본 유출, 중국의 부동산 위기 등을 부채질하게 된다.
중국 경제의 저성장 우려도 리스크 요인이다. 올해 중국 경제는 투자와 수출 회복 등에 힘입어 4%대 중반의 성장률이 예상된다. 하지만 미중 갈등, 부동산 부문의 부진과 물가 하락, 청년층 고용 악화, 양극화 등 구조적인 취약점으로 인해 중장기적으로 성장률이 3%대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중국 경제가 저성장에 빠지면 브라질·러시아 등 원자재 수출국과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타격을 받게 된다.
KDB산업은행 미래전략연구소는 “올해는 주요국들의 성장률이 1%대에 머무는 등 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성장 둔화세가 가시화할 것”이라며 “신흥국도 중국 경제성장률 하락, 선진국 소비 둔화 등의 영향으로 연말로 갈수록 성장 동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밖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지정학적 충돌에 따른 국제 유가 급등, 엘니뇨(해수 온난화 현상)로 인한 인플레이션 등도 세계 경제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세계 경제가 둔화하면 우리 경제도 영향권에 들 수밖에 없다. 국책·민간 연구기관, 증권사, 국제기구 등 20개 기관이 발표한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평균 2.0%였다. 한국은행의 올해 성장률 추정치 1.4%보다는 0.6%포인트 높지만 경기 회복이라고 보기에는 미약한 수준에 불과하다. 한은·한국개발연구원(KDI)·산업연구원(KIET)은 각각 2.1%, 2.2%, 2.0%로 예상했다. IMF와 아시아개발은행(ADB)은 각각 2.2%로 내다봤다. 증권사들의 전망치는 상대적으로 더 낮았다.
KIET는 “올해 국내 경제는 정보기술(IT) 경기의 완만한 회복세에 힘입어 수출과 설비투자가 증가세로 돌아설 것”이라면서도 “고물가·고금리의 영향으로 소비 성장세가 둔화하고 건설 투자가 위축되면서 완만한 성장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현대경제연구원도 “경기 침체 후 큰 폭의 반등세를 보였던 과거와 달리 올해 성장률은 지난해 1%대 저성장에 따른 기저 효과를 반영하더라도 잠재성장률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더구나 경제 전반의 활력이 떨어지면서 올해는 지난해와 정반대로 하반기로 갈수록 성장률이 하락하는 ‘상고하저(上高下低)’ 흐름을 보일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이들 20개 기관은 상반기와 하반기 성장률을 각각 평균 2.2%, 1.9%로 전망했다. KDI의 전망치는 상반기 2.3%, 하반기 2.0%였다. 완만한 경기 회복세마저 체감하기도 전에 꺾여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가 저성장 고착화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재정 확대와 저금리에 기반한 부채 증대에 의존해 임기응변식으로 성장을 도모하는 시대는 지났고 구조적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지적이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대내외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경제 역동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진입 장벽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교육 제도 개편 등 구조 개혁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며 “거시경제 정책은 물가 안정을 위해 당분간 긴축 기조를 유지하고 중장기적으로 재정 건전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금 구조 개혁을 미루면 성장 하락 속도가 더 빨라지면서 5년 정도 뒤에는 1%대 성장이 자연스러운 시기가 온다는 것이 정 실장의 경고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도 “한국 경제의 성장 엔진인 수출 확대를 위해 신시장 개척, 품목 다변화 등 정책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며 “신기술과 신산업 부문에 대해서는 미래 지향적인 규제 완화를 통해 국내 투자를 활성화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통화 완화, 재정 확장 등 전통적인 경기 부양책은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박춘성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현 상황에서 추가적인 경기 부양책이 시행된다면 정부와 민간 부채를 증가시켜 대외 건전성, 인플레이션, 금융 불안 등과 같은 위험 요인을 심화시킬 것”이라며 “올해 정책 방향은 경기 부양보다는 안정을 목표로 시장 기능을 통한 부채 감축과 구조조정 등 건전성 확보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 미중 갈등 등 대외 리스크의 국내 전이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주 이사는 “금융 시장 불안이 재연될 때 신속히 개입할 수 있도록 시장 안정화 수단과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며 “에너지와 주요 광물 비축 시설을 국내에 확충하고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해 수급 불안이 재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