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오래된 발전소를 개조해 2000년 문을 연 영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관인 이곳에서는 정부가 세금으로 물납받은 작품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실제 상속세 등 세금을 미술품으로 대신 내는 ‘미술품 물납제’ 덕분에 테이트모던 설립이 가능했다고 보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미국의 사진작가 도로시아 랭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테이트모던은 랭의 대표작 ‘이주민 어머니’를 소장하고 있다. 미 캘리포니아 이주 농민을 촬영한 사진으로 20세기 미국 대공황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테이트모던에 전시된 사진은 1950년 인쇄됐다. 사진 왼편에는 ‘영국 정부가 바버라 로이드의 상속세로 물납받았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
상속세 원조국인 영국은 1896년 미술품 물납 제도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미술품 물납제가 활성화한 프랑스의 도입 시점(1968년)보다 70년 가까이 빠르다. 영국예술위원회 등의 심의를 거쳐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은 현금 대신 세금으로 납부할 수 있다.
미술품 물납제의 목표는 ‘국민의 문화 향유권’이다. 세금을 내기 위해 상속받은 문화재 등을 시장에 파는 대신 정부에 물납해 국가의 문화적 부(富)를 축적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다. 프랑스만 해도 1973년 파블로 피카소의 사망 후 유작 200여 점을 상속세로 물납받았다. 프랑스 파리의 ‘피카소미술관’이 1985년 개관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런 맥락이 있다. 피카소미술관은 전 세계 미술관에서 가장 많은 피카소 대표작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미술품 물납제가 지난해 초 시행됐다. 이 때문에 2020년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남긴 ‘이건희 컬렉션’은 삼성가(家)의 상속세 납부로 이어지지 못했다. 모네·샤갈·피카소 등의 작품이 포진한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는 약 3조 원으로 평가받는다. 삼성 오너 일가가 내야 할 상속세(약 12조 원)의 30%가 넘는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국내 미술품 물납제는 아직 걸음마 단계로 활성화돼 있지 않다. 물납제 시행 첫해인 지난해에도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납부한 사례가 사실상 전무했다. 선진국처럼 관련 제도를 활성화하려면 감정평가 시스템 구축과 함께 제도 정착을 위해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국내의 한 세법 전문가는 “영국의 경우 미술품으로 세금을 대신 납부할 경우 상속세의 25%를 감면해준다”며 “선진국처럼 다양한 활성화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