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덴마크 코펜하겐의 ‘정치 1번지’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앞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가득 메웠다. 52년 만의 왕위 계승을 지켜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덴마크 국민들이었다.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의 즉위 52주년을 맞은 이날 83세의 여왕은 국무회의에서 퇴위 선언문에 서명하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지난해 12월 31일 신년사 발표 도중 “책임을 다음 세대에 맡길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퇴위를 깜짝 발표한 지 2주 만이다. 1000년이 넘는 덴마크 왕정사에서 군주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은 것은 1146년 에릭 3세 이후 약 900년 만이다. 여왕의 서명과 동시에 55세의 장남 프레데릭 왕세자는 덴마크·그린란드·페로제도의 새 국왕 프레데릭 10세로 즉위했다.
마르그레테 2세는 덴마크에서 1380년대 이후 최초로 나온 여왕이었다. 여성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게르만 관습법인 ‘살리카법’이 1953년 폐지된 뒤 1972년 선친 프레데릭 9세의 서거에 따라 31세에 왕위에 올랐다. 뜻하지 않은 즉위였지만 그는 특유의 소탈함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왕실 운영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가족 불화를 감수하고 왕실 축소를 위해 차남의 자녀 4명의 왕족 지위를 박탈했을 정도로 국민 혈세를 아끼는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덴마크 왕실이 쓰는 비용은 영국 왕실의 8분의 1 미만이다. 이 같은 노력 덕에 1972년 42%이던 왕실 지지율은 여왕의 재위 기간 중 80% 안팎으로 올라섰다. 여왕의 용퇴로 국민 호감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소탈함에 더해 기후위기 등 21세기 이슈들에 큰 관심을 보이는 프레데릭 10세 부부에 대한 국민 지지율은 80%를 훌쩍 넘는다.
낡은 이념과 기득권을 지키는 데 혈안인 우리 정치권은 덴마크 여왕의 아름다운 퇴장을 어떻게 바라볼까. ‘86세대 교체’ 등에 대한 국민 요구는 날로 커지는데 여의도에서는 구태 정치를 반복하는 기성 정치인들이 젊은 세대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새 정치의 닻을 올리기 위해서는 4·10 총선은 실력과 도덕성을 갖춘 인사들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되는 장이 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