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대형 플랫폼 기업 사전 규제를 골자로 하는 ‘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플랫폼법)’ 제정 추진을 공식화한 지 한 달도 안 돼 미국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전달되면서 입법 동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 정부가 구글·메타 등 자국 기업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며 관련 법을 만들지 말 것을 요구한 셈이라 자칫 외교·통상 갈등의 불씨가 될 소지가 있는 탓이다. 국내에서도 플랫폼 관련 법이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대표 기업에 대한 과도한 규제로 연결돼 신산업을 옥죌 것이라는 이견도 있는 만큼 문제는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미 간에 이 문제를 두고 입장 차가 나타날 가능성이 커 사태 향방이 주목된다.
17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미 국무부와 상무부는 최근 한국 정부에 플랫폼법 제정 추진에 대해 우려의 입장을 전했다.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에 플랫폼법의 영향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과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줘야 하며 이 법이 미국 기업이 한국 시장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게 하면 안 된다는 게 골자다. 플랫폼법 대상에 구글과 메타 등 자국 기업이 포함되는 만큼 서둘러 의견 전달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내부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감지된다. 일단 플랫폼법이 국내외 기업에 차별 없이 적용되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플랫폼법의 핵심은 시장 지배력이 큰 대형 플랫폼 기업을 미리 지정해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자사 이용자에게 경쟁 플랫폼의 이용을 금지하는 것), 최혜 대우 요구 등의 행위를 집중 감시하는 것이다. 위법 소지가 포착되면 조사·심의에 나서는 현행 공정거래법상 ‘사후 규제’가 아니라 위법 여부를 상시 들여다보는 ‘사전 규제’로 전환하는 것이어서 기업 부담이 한층 커진다. 매출액과 이용자 수 등을 고려하면 구글·메타 등 미국 기업과 네이버·카카오·쿠팡 등 국내 기업이 사전 규제 대상에 포함될 공산이 크다.
이런 탓에 그간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미국 산업계는 여러 방식으로 플랫폼법에 대한 우려의 입장을 밝혀왔다. 구글·메타·쿠팡 등을 회원사로 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가 지난해 말 “새로운 사전 규제를 논의하기보다는 기존 법을 활용해 최소 규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이에 대해 “미국 기업들을 회원사로 둔 암참이 업계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이를 정부 간 공식적인 문제 제기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 행정부가 한국 정부에 이 같은 입장을 전했다는 점에서 사태 추이에 따라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
미국의 정치·안보 분야 대표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재차 우려의 입장을 밝힌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11일 윌리엄 라인시 CSIS 국제경제석좌 겸 선임자문관은 기고문을 통해 “한국의 친기술(pro-tech) 정부가 미국 플랫폼을 불공정하게 겨냥하는 유럽연합(EU)과 유사한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결국 (법 규제 대상이 아닌) 중국 기업이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CSIS는 지난해 6월에도 같은 취지의 기고문을 게재한 바 있다. 사안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미국에서 CSIS는 일종의 ‘섀도 캐비닛’이라고 할 정도로 관가에 영향력이 있는 곳”이라며 CSIS의 이 같은 기고와 그 영향을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의회 내 분위기도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게 시장의 분석이다. 처음에는 미국 정부와 의회도 국내에서 자국 플랫폼 기업에 대한 규제에 박차를 가하는 법안을 대거 마련했다. 하지만 팬데믹 사태를 거치며 신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었고 과잉 규제 논란 속에 관련 법안 논의도 수그러든 상황으로 알려졌다.
국내도 미국 우려를 계기로 법 추진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네이버와 카카오·쿠팡은 국내에서 영향력이 클지는 몰라도 해외에서는 그렇지 않다”며 “구글·메타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게 맞을지 천천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조만간 암참과 함께 미국 산업계를 직접 만나 법 취지를 설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