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의 성공사를 돌아보면 오너들의 결단이 결정적 성패를 가르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전히 반기업 정서가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오너 경영의 부정적 사례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10년, 20년을 내다보는 투자는 오너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대다수 경영학자의 설명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의 반도체 사업과 LG의 배터리 사업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1983년 2월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하는 이른바 ‘도쿄 선언’으로 대한민국의 운명까지 바꿔 놓았다. 당시 일본 반도체 기업 경영진들은 “삼성이 드디어 미친 게 틀림없다”고 비웃었지만 이 창업회장은 막대한 적자 속에서도 결코 도전 정신을 접지 않았다. 그의 ‘반도체 보국(報國)’ 정신은 이후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으로까지 이어져 현재 전 세계 1위 메모리반도체 기업을 만드는 초석이 됐다.
전자·자동차·정유화학을 잇는 우리나라의 신성장 동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배터리 산업 역시 그 이면에는 구본무 전 LG그룹 회장의 도전 정신이 있었다. 구 회장은 1992년 영국 출장길에서 여러 번 충전이 가능한 2차 전지를 처음 접한 뒤 샘플을 챙겨와 럭키금속(현 LG화학)에 연구를 지시했다. 이후 막대한 연구개발(R&D) 비용이 투입됐지만 뚜렷한 성과가 나지 않자 그룹 내부에서는 “사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보고서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하지만 구 회장은 “결코 포기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거듭 지시했고 마침내 2001년 2200㎃h급 노트북용 원통형 리튬이온 배터리를 세계 최초로 양산했다.
올해는 특히 인공지능(AI) 혁명 속에서 기업의 과감한 선택을 위한 오너들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17일 “올해처럼 산업이 급변하는 시기에는 특히 대기업 총수들이 회사의 방향성을 제시하면서도 직접 발로 뛰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이들의 리더십에 따라 해당 기업뿐 아니라 국내 경제 전반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오너들의 행보가 기업의 경영뿐 아니라 국가적 현안 해결에 도움이 된 사례도 많다. 2019년 일본이 반도체 부품·소재 수출 규제를 단행한 직후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은 일본을 직접 찾아 현지 삼성 협력사 교류 모임인 LJF를 비롯한 일본 재계 네트워크를 가동해 분쟁 조기 해소에 힘썼다. 출장 직후에는 긴급 사장단회의를 소집하며 삼성전자 및 계열사들과 함께 공동 대응 체계를 마련하고 주요 소재의 수입처 다각화 등 대안을 마련해 반도체 생산 차질로 이어지지 않았다. 당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역시 수차례 일본을 방문해 현지 경제계 인사들과 면담하며 규제 해소에 주력했다.
이듬해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총수들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회장은 코로나19 사태 당시 국내 백신 공급이 늦어지자 주요 계열사 임원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를 지휘하면서 양산 체제를 갖추고 화이자·모더나 경영진과 직접 협상하며 코로나19 백신 생산을 앞당겼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솔직히 위기 때마다 그룹 오너의 역할이 컸던 것도 사실”이라면서 “해외에서도 가장 두려워하는 게 오너 체제의 그룹과 정부가 힘을 합칠 때인데 그만큼 파괴력이 컸다는 얘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