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투자 공부를 하겠다 마음먹고 몇 권이라도 책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이건 번역가다. 피터 린치가 쓴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 벤저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 등 주식 투자의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60여 권의 양서들이 그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여의도에서 20여 년간 전문 투자자로 일하다 이후 20여 년간을 번역가로 살고 있는 그는 번역 실력도 실력이지만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으로도 유명하다. ‘이건 선생님이 번역한 책은 믿고 본다’는 말이 투자자들 사이 정설로 통할 정도다.
실제로 호평을 받는 투자 양서 대부분은 이 번역가가 직접 골랐다. 그는 “품질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자 비결도 사실은 책 선정에 있다”고 설명했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번역을 할 때 아무래도 더 집중이 됩니다. 또 좋은 책을 번역해 세상에 내놓는 일은 고통을 감내하는 보람이 있죠. 하지만 신중하게 책을 골라도 ‘아, 이게 아닌데’ 생각되는 책들도 나옵니다. 그럴 때는 정말 작가가 미워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만족도 덜 하죠. 실패를 몇 번 겪으니 더욱 신중해집니다. ‘앞으로 책을 더 잘 골라야겠다’고.”
그렇다면 좋은 책을 찾아내는 비결이 있을까. 우선 좋은 책을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 번역가는 “사람도 그렇지만 책도 유유상종의 원리가 있다”며 “책이란 서로 영향을 미치며 쓰여지기 마련이기에 좋은 책을 읽을수록 좋은 책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된다”고 했다. 아마존 서평도 많이 참고한다. “아쉽게도 한국 서점의 별점 서평은 다소 오염된 감이 있지만 아마존은 아직 덜한 편”이라면서 “특히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성껏 남기는 혹평은 나쁜 책을 골라내는 데 큰 도움을 준다”며 웃었다.
가장 눈여겨보는 것은 저자다. 이 번역가는 “특히 투자서의 경우 저자가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시장에서 검증받은 ‘실력자’이고 다른 하나는 ‘생계형 작가’”라며 “나는 실력자의 책만 번역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장에서 투자 실력을 입증한 사람은 애당초 많지 않고 그런 사람들은 아주 바빠서 책도 잘 쓰지 않는다”며 “실력자의 책은 그렇게 많지 않기에 조금만 신경 쓰면 쉽게 찾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이런 ‘실력자’의 대표가 바로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다. 이 번역가는 자타공인 ‘버핏 빠(광팬)’이자 버핏을 가장 잘 이해하는 번역가로 꼽힌다. 물론 버핏은 직접 책을 쓴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만 반세기 이상 발행해온 버크셔해서웨이 주주 서한과 매년 봄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리는 주주총회의 발언들이 투자자들 사이에 ‘복음’처럼 떠돈다. 한국 온라인 서점에서 ‘버핏’으로 검색되는 책만 수천 종이지만 원전이 되는 1차 자료는 모두 같은 셈이다.
같은 자료가 토대이니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닐까 싶지만 이 번역가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버핏에 대해 하지 않은 이야기는 아직 많다는 것이다. 그는 “주주 서한을 모두 번역해 가지고 있는데 그 양만 해도 200자 원고지 기준 9000매가 넘는다”고 말했다. 통상 단행본 책 한 권이 1000매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양이다. 내용도 결코 단순하지 않다.
“버핏은 메시지를 아주 정교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지만 쉬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얄팍하지 않고 회계나 보험처럼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며 깊이 생각해야 실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중요히 하기에 상당히 어렵죠. 버핏을 오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도 다른 글을 번역할 때보다 2배는 더 공을 들이죠.”
이미 버핏과 관련된 서적 10여 종을 출간한 번역가가 다시 한번 버핏을 꺼내든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최근 출간된 ‘투자도 인생도 버핏처럼’에 대해 “버핏에 관한 책은 많지만 초심자가 읽기에는 대부분 조금 어렵다”며 “문턱을 낮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한 일종의 ‘초보용 버핏 가이드’”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버핏은 투자뿐 아니라 삶의 지혜라는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많이 했다”며 “투자와 인생 두 가지를 다 쉽고 균형 있게 전달하려고 한 책”이라고 말했다.
버핏이 강조하는 개념인 ‘능력 범위(circle of competence)’를 자주 생각한다는 그는 공저와 협업을 자주하는 번역가이기도 하다. 이번 책도 앞서 ‘찰리 멍거 바이블’ 등을 공저한 버핏 전문가이자 기자인 김재현 박사와 함께 썼다.
“제가 항상 생각하는 건 독자들에게 진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저도 과거 투자자였으니 투자의 본질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지만 지금 독자가 실감나게 읽을 만한 투자 사례는 현업 투자자가 더 잘 알겠죠. 또 번역은 제 능력 범위지만 글을 쉽게 풀어내는 작업 등은 더 뛰어난 사람도 많을 겁니다. 제가 가지지 않은 밑천, 저보다 풍부한 경험치를 가진 사람과 함께 일반인도 읽기 쉬운 품질 높은 책을 쓰는 것, 그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제 목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