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의 차세대 프로세서인 ‘루나레이크’에 삼성전자(005930)의 메모리가 탑재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루나레이크는 인공지능(AI)의 연산 성능을 크게 향상시킨 중앙처리장치(CPU)로 올해 인텔의 야심작으로 꼽힌다.
특히 루나레이크는 시스템반도체와 메모리가 한 몸으로 패키징되는 ‘통합 메모리’ 기술이 적용돼 연산 속도 등 기존 칩셋의 한계를 뛰어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1위 자리를 놓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삼성전자와 인텔이 패키징 분야에서는 오히려 동맹을 강화한 셈이다.
미셸 존스턴 인텔 PC 총괄부사장은 12일(현지 시간) 폐막한 ‘CES 2024’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연말 출시할 신형 CPU 루나레이크에 애플이 ‘M시리즈’에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메모리 패키지 기술이 처음 적용된다”며 “패키지에는 삼성전자 메모리를 탑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존스턴 총괄부사장이 언급한 ‘애플과 동일한 기술’은 칩셋 외부에 있던 메모리를 내부로 들여오는 통합 메모리를 뜻한다. 인텔 최고위 임원이 자사 최초의 통합 메모리 패키징에 삼성전자 D램이 장착된다는 점을 공식화한 것이다. 애플은 통합 메모리 방식의 M시리즈를 앞세워 노트북 시장에서 우위를 지켰는데 인텔도 처음으로 통합 메모리를 적용해 견제에 나선 것이다. 루나레이크는 통합 메모리를 바탕으로 AI 성능도 세 배 높인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 LPDDR5X D램 중 최고 속도인 8.5Gbps(기가비피에스·초당 기가비트)급이 적용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애플의 전유물이던 통합 메모리가 PC 시장으로 확대되며 고성능 메모리 수요 또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AI 확산과 더불어 스마트폰과 PC 시장도 성장세로 돌아서며 메모리 시장이 호황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 이유다.
삼성전자와 인텔은 글로벌 반도체 업계 매출 1위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해왔다. 기존 주력 분야는 각각 메모리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시스템반도체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올해부터 인텔이 파운드리 시장에 복귀하며 치열한 수주전이 펼쳐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를 아우르는 반도체 생태계 전반에서 삼성전자와 인텔은 어쩔 수 없는 공생 관계다. 최근 들어 반도체 패키징 기술이 발전하며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윈윈’이 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2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인텔이 연말 출시할 예정인 노트북용 모바일 중앙처리장치(CPU) ‘루나레이크’는 3차원(3D) 패키징 기술 ‘포베로스’를 이용해 삼성전자 LPDDR5X 메모리를 통합한다.
패키징은 각기 다른 반도체를 한데 묶어 하나의 칩셋처럼 작동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3차원 패키징은 2차원(2D) 수평에 반도체를 나열하는 기존 기술과 달리 칩을 수직으로 쌓아 공간 효율을 높이는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공간을 입체적으로 활용해 집적도를 높일 수 있음은 물론 각 반도체 간 신호도 더욱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다. 마치 도로를 복층화해 교통량을 늘리는 것과 유사한 구조다.
메모리를 칩셋에 결합하는 통합 메모리도 패키징을 통해 반도체 간 신호 전달을 보다 빠르게 하기 위한 기술이다. 메모리가 칩 외부에 있다면 접근하기까지 ‘노선’이 길어 속도가 느려진다. 또 CPU와 그래픽처리장치(GPU)·신경망처리장치(NPU)가 같은 정보에 매번 별도로 접근할 수밖에 없어 같은 일을 여러 번 해야 한다. 메모리가 내부에 통합되면 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CPU·GPU·NPU가 동시에 같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제아무리 ‘두뇌’가 빨라도 메모리에서 발생하던 병목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통합 메모리가 적용되면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가 ‘한 몸’이 되는 만큼 설계단부터 각 제조사 간의 공조가 중요해진다. 기존 PC는 CPU가 지원한다면 어떤 메모리를 장착해도 큰 차이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CPU와 메모리가 ‘한 세트’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같은 노트북·스마트폰 모델에도 각기 다른 D램이 쓰이는 경우가 흔했으나 앞으로는 최초 설계단부터 최적화한 메모리만 쓰이는 경우가 잦아질 것”이라며 “마치 엔비디아 GPU에 SK하이닉스 HBM3가 독점적으로 쓰인 상황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파운드리에서 경쟁 관계에 놓인 삼성전자와 인텔이지만 양 사는 과거부터 긴밀한 공조를 보여왔다. 특히 이번에 협력이 진행되는 노트북 칩셋 분야에서 양 사는 ‘혈맹’에 가깝다.
삼성전자의 모바일 인공지능(AI) 생태계에서 중요한 축을 맡고 있는 ‘갤럭시북’이 대표적인 예다. 미셸 존스턴 인텔 PC총괄부사장은 세계 최대 전자·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4’에서 루나레이크를 공개하며 인텔 칩셋을 사용한 노트북의 대표 주자로 갤럭시북을 소개했다. 그는 “인텔과 삼성의 협력은 굉장히 멋지다(Absolutely gorgeous)”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 노트북 전략을 총괄하는 이민철 MX사업부 갤럭시 에코비즈팀장이 참석하기도 했다.
인텔의 파운드리 참전도 예상과 달리 삼성전자와의 ‘치킨 게임’으로만 흐르지 않을 수도 있다. 당초 반도체 업계는 인텔이 빠른 속도로 초미세공정에 진입하며 삼성전자의 수주 물량을 뺏어갈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었다. 인텔은 아직 양산에 돌입하지 않은 18A(1.8나노) 고객사를 수주했다는 소식을 공개하며 기세도 올리고 있다. 동시에 다른 영역에서는 협업을 통해 ‘윈윈’ 전술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양 사의 파운드리 상부상조 가능성은 패키징에서 시작된다. 업계는 ‘칩렛(조각)’ 패키징의 발전에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칩렛은 칩셋을 조각조각 분리해 따로 제조한 뒤 하나로 결합하는 기술이다. 완성 칩의 NPU는 삼성전자, GPU는 TSMC, CPU는 인텔이 제조해 합칠 수 있는 식이다. 칩렛 적용이 확산된다면 각 파운드리의 생산 여건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어 반도체 공급난이 상당 부분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칩렛 기술의 확산은 파운드리 1위 TSMC와 수주전에서 밀리고 있는 삼성전자와 인텔에는 기회 요소다. 기존에는 TSMC가 고가의 초미세공정 반도체 수주를 독식하는 구조였으나 앞으로는 물량의 일부를 하위 그룹이 나눠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인텔과 삼성전자는 개방형 칩렛 표준화 컨소시엄 ‘UCIe’를 결성하며 칩렛 확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UCIe에서 인텔은 ‘의장사(chairman)’를, 삼성전자는 ‘회장사(president)’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