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구 사용 시 크기와 소재가 적합한 조리 기구를 사용한다.’ ‘(음식을 서빙할 때) 이동 경로의 상태를 미리 파악하고 차분히 이동한다.’
27일부터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이 확대 시행되면서 새로 이 법을 적용받는 5~49인 사업장이 안전 체계 미비로 처벌받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업장이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들기 위해 참고할 정부 안전 수칙 안내서에는 여전히 모호한 표현이 적지 않다. 확실한 안전 체계가 없는 사업장들이 처벌에 대한 불안감이 큰 점을 고려하면 그동안 정부의 대응이 너무 안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26일 중대재해법 수사와 산업재해 예방을 담당하는 고용노동부와 산하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두 기관은 2022년 1월 도소매업과 음식점업이 활용할 ‘안전보건관리체계 자율 점검표’를 제작해 배포했다. 같은 달 27일 중대재해법 우선 시행을 앞두고 현장의 혼란을 줄일 서비스 업종에 대한 최초의 안전 점검표였다. 당시 고용부는 이 점검표와 안전관리 체계 가이드북, 중대재해법 해설서, 사고 유형별 매뉴얼 등을 활용하면 중대재해법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음식점업 자율 점검표는 점주 스스로 어느 범위까지 안전한지 가늠하기 어려운 모호한 표현이 담긴 수칙이 적지 않다. 조리에 관한 안내의 경우 기구·화구 사용뿐 아니라 조리용 기구도 ‘적절한 장소’에 보관하는지 점검하도록 안내했다. 점심·저녁과 같이 일이 몰리는 음식점 현장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수칙도 있다. 채소절단기를 사용하다 고무장갑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고에 대한 예방 수칙으로 ‘맨손 작업’을 권고한 게 대표적인 예다. 배기 후드를 청소할 때도 사다리나 위험 기계를 사용할 때의 수칙인 2인 1조 작업을 권장했다.
물론 이런 안전 수칙은 모든 현장의 안전 사항을 규율하기 불가능한 상황에서 안전 의식이 자연스럽게 현장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 오히려 인원, 인적 특성, 업종, 기업 규모가 다른 사업장을 일률적으로 규율하면 과도한 안전 규제로 지적될 수 있다.
우려되는 점은 중대재해법의 형사처벌로 인해 커진 현장의 불안감을 불명확한 안전 수칙과 규정이 더욱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대재해법 제정과 시행 직후 경영계가 법 조항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요구를 이어왔던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현장 요구를 수용한 여당에서는 중대재해법 보완책으로 정부의 안전인증제가 담긴 법안이 발의하기도 했다.
노동계에서는 중대재해법과 해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과도한 불안감을 낮추는 게 정부의 우선 과제라고 조언한다. 법 적용 사업장이 알아야 할 사항들로는 △중대재해법을 적용받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 판정 방식 △중대재해법은 안전관리체계가 실제 이행돼야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점 △전체 사망 산재의 절반은 건설업에서 일어나고 음식점업 발생률이 1%대로 미미한 점 △영세 사업장은 안전관리 선임과 전담 조직 설치 의무 면제 △건설 현장에서 발주처는 사고 책임을 지지 않는 점 △점주의 배달 기사 사고 책임은 고용 관계에 따라 다른 점 등이 거론된다.
정부·여당이 원한 중대재해법 시행 유예 법안이 처리되지 않은 데 대한 책임 공방은 이날도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중소기업의 어려움과 민생 경제를 도외시한 야당의 무책임한 행위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은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놓고 국민 편 가르기를 한 망언”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중대재해법 전면 시행에 따른 현장의 혼란과 불안을 낮추는 데 속도를 낸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이날 긴급 전국기관장회의를 열고 새로 법 적용을 받는 약 83만 개 사업장을 전수 점검하고 부족한 안전 체계에 대한 교육과 컨설팅, 재정 지원에 나선다는 대책의 빠른 시행을 일선 기관장에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