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직권 남용 충분히 증명 안 돼”…항소심도 뒤집기 어려울 듯

■[‘사법농단’ 양승태 1심 선고]
선고도 재판 만큼 장시간 진행돼 휴정
각종 재판개입 등 적용된 혐의만 47개
확정 판결 나오려면 추가로 수년 소요
관련자 대부분 무죄로 뒤집기 어려울듯
“명쾌하게 판단 내린 재판부에 경의를”

‘사법 농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오른쪽) 전 대법원장이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환한 표정으로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연한 귀결이라고 봅니다. 이런 당연한 귀결을 명쾌하게 판단 내려주신 재판부에 경의를 표합니다.”


‘사법 농단’ 의혹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취재진에 이 같은 입장을 전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 부장판사)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정에 출석한 양 전 대법원장은 재판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해오다가 무죄 공시 안내문을 받자 미소를 짓기도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1심 재판이 기소 이후 4년 11개월, 1810일 만에 마무리됐다. 이번 사건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장이 검찰에 피의자로 소환된 데 이어 구속 수감됐지만 무죄가 선고되면서 ‘역대 최장기 재판’이라는 오명만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고와 항고를 거쳐 확정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의도적 재판 지연 의혹으로 사법부의 신뢰를 훼손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1년 9월 취임 이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등에게 반헌법적 구상을 보고받고 승인하거나 직접 지시한 혐의로 2019년 2월 11일 구속 기소됐다. A4용지 296쪽에 달하는 공소장에는 일제 강제 동원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 소송,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통보 처분 사건 등 각종 재판 개입,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헌법재판소 견제, 비자금 조성 등 총 47개 범죄 사실이 빼곡히 적시됐다. 임기 내 숙원 사업인 상고법원 설치, 법관 재외공관 파견, 헌재 상대 위상 강화 등을 목적으로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재판에 개입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번 사건의 핵심인 양 전 대법원장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법원행정처나 수석부장판사 등에게 일선 재판부의 판단에 개입할 권한이 없고 각 재판부는 법리에 따라 합의를 거쳐 판단했을 뿐이어서 권리 행사를 방해받지 않았다는 논리다. 앞서 기소된 12명의 전·현직 판사들 대부분도 같은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고 이 가운데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만 유죄로 인정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날 재판은 혐의가 방대한 만큼 일반 형사 재판과는 달리 시작부터 선고까지 무려 4시간 30분 가량이 소요됐다. 장시간 이어진 재판에 재판부는 선고 중간에 이례적으로 10분간 휴정을 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재판장인 이종민 부장판사는 재판 도중 “공소장이 300여페이지에 달한다. 따라서 판결 이유 설명만으로 상당히 많은 시간이 예상된다”며 “일과 중 선고가 마쳐질지 미지수”라는 당부를 전하기도 했다.


재판이 지연된 가장 큰 이유는 피고인과 검찰 측의 치열한 법리 공방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 측은 그동안 “공소장은 한 편의 소설”이라며 “사법부에 대한 정치 세력의 엄혹한 공격이 이 사건의 배경”이라고 주장하며 혐의 대부분을 부인해왔다. 이에 따라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두고 전·현직 판사 등 법정에 선 증인만 211명에 달했고 이들이 재판부의 소환에 불응하거나 출석을 미루면서 재판은 점점 늘어졌다.


정기 인사 등으로 재판부가 변경되는 일도 있었다. 양 전 대법원장 측은 재판부가 변경되자 공판 갱신 절차를 이유로 증인 진술과 증거서류 조사를 다시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법정에서 증인들의 진술 녹취 파일을 재생하는 데 7개월이 소요되기도 했다. 재판 초기 코로나19 확산세에 양 전 대법원장이 폐암 수술을 받으면서 2개월가량 재판이 중단되기도 했다. 재판부는 당초 지난해 12월 22일 선고 공판을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기록 검토 등을 이유로 기일을 연기하면서 또 한 해를 넘겨 5년 만에 재판이 마무리됐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사법행정을 잘 아는 피고인의 의도적인 ‘재판 지연 전략’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김명수 코트(Court)’가 물러나고 사법부의 보수화 색채가 짙어질 때까지 의도적으로 시간 끌기를 해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후임인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퇴임했고 윤석열 대통령 임기 내에 대법관 전원이 교체를 앞두고 있어 상고심을 유리하게 끌고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 재판을 최대한 늦추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1심 선고 직후 검찰 측이 상고하겠다는 뜻을 밝힌 만큼 향후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오기까지는 추가로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앞선 사법 농단 재판에서 관련자들이 대부분이 무죄 판단을 받은 만큼 항소심에서도 기존 판단을 뒤집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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