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상황에서는 금리 인하가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보다 부동산 가격 상승 기대를 자극하는 부작용이 더 클 수 있습니다.”
올해 1월 첫 통화정책방향 회의에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통화 긴축 기조를 충분히 장기간 지속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부동산 가격 자체가 높은 편”이라며 “다시 상승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섣불리 금리 인하에 나서면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자극해 물가가 다시 오를 수도 있다고 했으나 이창용 총재 머릿속에 ‘물가’와 함께 ‘집값’이 들어있음이 드러난 셈이다.
한국은행의 최우선 목표는 물가안정이고 이 과정에서 금융안정에 유의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기적 시계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에 수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특정 자산가격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집값 상승과 가계부채 증가 등이 실물경제에 비해 과도할 경우 통화정책 운용 과정에서 ‘금융불균형 누증 위험’을 고려하고 있다. 2021년 8월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했을 때도 ‘물가’보단 ‘금융불균형 누증 위험’이 주요 요인이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자산보다도 부동산 가격이 가계부채 문제와 맞물리면서 사실상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한은이 ‘2024년 통화신용정책 운영방향’에서 충분히 장기간 긴축기조를 지속하겠다며 “가계부채에도 유의하여 통화정책을 운용할 필요가 있는 점을 고려한다”고 한 것은 이에 대한 방증이다.
‘중앙은행이 자산가격을 고려해야 하나’라는 해묵은 논쟁이 중요해진 것은 올해 말 물가가 목표 수준으로 낮아졌는데 부동산이 조정되지 않고 가계부채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은이 긴축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도 고물가 영향이다. 집값과 가계부채는 그다음 고려 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저물가·저금리 여건이 돌아올 수 있을지도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다만 한국은행 내부에서도 자산가격을 둘러싼 생각이 제각각인 만큼 쉽게 결론을 내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중앙은행이 자산가격을 주요 변수 중 하나로 고려해야 하는지, 중앙은행이 자산버블을 사전에 대응할 수 있을지는 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오래된 논쟁거리다.
이 논쟁에서 부정적인 입장은 중앙은행이 적정 자산가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전에 버블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고, 통화정책은 ‘무딘 칼’인 만큼 특정 자산가격을 겨냥했다간 실물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2021년 8월 한은이 금융불균형 누증 위험을 이유로 금리를 올린 것에도 비판적이다.
반대로는 중앙은행이 물가만 보고 통화정책을 하다간 자산 버블을 키워 금융안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통화정책이 집값 상승 주범이라고 볼 순 없지만 그렇다고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다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한은 내부에서도 거시건전성정책과 통화정책의 조합 실패가 금융불균형을 키웠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전직 금융 관료는 “저금리로 둑이 무너진 것처럼 돈이 풀리면 감독만으로는 문제를 막긴 힘들다”고 털어놨다.
무엇보다 중앙은행의 목표는 절대불변이 아니다. 물가안정만 있던 한국은행법 1조에 금융안정이 추가된 것도 2011년이다. 한은이 금융불균형을 이유로 금리를 올릴 수 있던 것도 금융안정 목표가 추가됐기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로는 고용안정을 추가하는 법안마저 여러 건이 발의됐다. 중앙은행을 위기를 겪을 때마다 극복 방법을 찾아내며 생물처럼 발전해 왔다. 이번 팬데믹과 인플레이션 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역할은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먼저 2010년대와 같은 저금리·저물가가 돌아오기 힘들 것이란 분석에 동의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2008년 이후 대규모 유동성 공급에도 인플레이션이 나타나지 않았던 요인들이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엔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면서 저가 물건을 공급했는데 미·중 갈등과 미국 등 선진국의 산업정책 등으로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친환경 전환도 에너지 가격에 상승 압력을 주는 요인이다. 오히려 양적완화가 이뤄졌던 2010년대가 이례적인 기간이라는 것이다.
팬데믹 이후 나타난 과잉 유동성 공급도 영향을 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 세계 중앙은행과 정부는 팬데믹이라는 ‘비경제적인 요인으로 인한 경제 위기’ 상황에 대응해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통화·재정정책을 펼쳤다. 당시로써는 팬데믹이 언제까지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을지 판단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백신이 이토록 빠르게 개발돼 보급될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양적완화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해봤던 경험과 법적 검토를 끝낸 상태였다. 돈을 아무리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전쟁 등 공급 요인이 나타나면서 결국 40년 만에 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팬데믹 이후 유동성 공급은 불가피했다지만 이후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런 만큼 인플레이션 안정을 위해 통화·재정정책을 당분간 긴축적으로 운용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인플레이션 위험을 인지한 만큼 미 연준도 과거와 같은 초저금리 시대로 회귀하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기타 고피나스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도 이달 16일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장기적으로 정책금리를 평균적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저금리 기간보다 높을 것”이라고 했다.
한은 관계자는 “예전에 비해 높아진 고물가가 얼마나 이어질지 단정하긴 어렵지만 그에 따라 전 세계 중앙은행의 정책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향후 전 세계 중앙은행은 과잉 유동성을 관리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미 연준이 한은처럼 부동산 등 자산가격을 주요 변수로 고려할 가능성은 작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디레버리징이 이뤄졌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미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7년 4분기 98.7%에서 지난해 2분기 73.7%로 낮아졌다. 반면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69.2%에서 101.7%로 30%포인트 이상 상승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자는 “우리나라는 최근 몇 년 동안 집값이 들썩였기 때문에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으나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미국은 집값이 한 번 조정됐을 뿐만 아니라 자산가들이 대부분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이 집 한 채 가진 구조라 오히려 집값이 올라야 자산 불평등이 해소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은은 왜 이렇게까지 가계부채와 집값을 신경 쓰고 있을까. 한은은 여러 보고서를 통해 가계부채 비중이 높으면 실물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등 다양한 요인을 설명하고 있다. 최근 한은에서 나온 연구를 보면 초저출산과 초고령사회 등 극단적 인구구조의 배경 중 하나로 주택가격 급등을 꼽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국은 이미 중장기적인 시계로 부채를 줄이는 디레버리징이 필요하다는 정책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다만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거시건전성정책으로 대응하는 것이지, 통화정책으로도 대응할 필요가 있는 지까진 합의되지 않았다. 이는 당분간 한은 내부에서도 논의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반대 목소리도 크다. 당장 ‘금융불균형’이라는 것이 측정하거나 판단하기 어려운 기준이라는 것이다. 물가는 소비자물가 상승률 2%라는 명시적 목표가 있으나 금융불균형은 그렇지 않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통화정책이 자산가격 변동에 영향을 해야 하는 것처럼 돼 있는데 부동산은 수급 영향이 가장 크다”며 “집값을 금융으로 통제할수록 금융 자산화되기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고 했다.
※ ‘조지원의 BOK리포트’는 국내외 경제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Bank of Korea)을 중심으로 국내 경제·금융 전반의 소식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