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한국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다고?

미국 작가, 한국 여행 뒤 정신건강 우려 지적
최저 저출생·입시지옥·최고 노인자살률 등
한국전쟁 후 생존차원 과도경쟁 부작용 산물  
정치혁명만이 국가 지속가능·삶의 질 담보
선진국·한류 저력…역동·포용적 문화 절실

고광본 선임기자(부국장)

미국 작가인 마크 맨슨이 최근 유튜브에 띄운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하다’라는 영상이 화제다. 영상을 보기 전에는 너무 작위적이고 자극적이라고 느꼈다.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우크라나이나 주민들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중동 등 세계 곳곳에 식량과 보건의료 등 기본 인권도 갖추지 못한 나라가 즐비한 것이 현실 아닌가.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폭압적인 일제강점기,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보릿고개라는 참혹한 현실을 딛고 산업화·민주화·정보화라는 대성공을 거뒀다. 2021년에는 유엔무역개발협의회(UNCTAD)에서 유엔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 어려서 시골에서 새마을운동에 동참하며 산업화·민주화·정보화의 변화를 몸으로 겪은 기자 같은 베이비붐 세대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올해 잠재성장률이 1%대로 쪼그라들 것으로 예상되는 현실에서 역동적인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하는 마음도 간절하다. 그래야 국가의 지속 가능성도, 자신과 자녀의 일자리도, 노후 생활도, 가족의 행복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생 딸과 함께 이 영상을 보면서 한국전쟁 후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유교와 자본주의의 장점은 취하지 않고 단점을 취해 정신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그의 통찰력에 공감이 갔다. 희생 의지와 능력이 작을수록 수치심을 느끼고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단점이 극대화돼 엄청난 스트레스와 절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가족·지역사회와의 친밀감, 자기표현과 개인 존중 같은 장점은 무시됐다며 안타까워했다. 한마디로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식의 약육강식 사회가 됐다는 얘기다. 맨슨은 행복의 조건과 관련해 “미국인은 건강, 인간관계, 경제 안정 순으로 꼽는 데 비해 한국인은 경제 안정, 건강, 인간관계 순으로 본다”고 비교했다. 그 결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불안·우울증·알코올중독 비율이 높은 것도 모자라 자살률 1위, 노인 빈곤율 1위가 됐다.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통해 “무조건 노력하는 것만으로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엉망진창이어도 괜찮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한 맨슨의 눈으로 보면 한국은 가장 우울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딸에게 영상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입시 지옥에 내몰리며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다가 대학에 가서도 극심한 경쟁 환경으로 진로가 막막하다’며 공감을 표했다. 실제 우리 대학생은 양질의 일자리 부족에 고통받고 중고교생은 미국·유럽과 달리 운동·음악·취미 활동은 꿈도 꾸지 못한다. 대학의 환골탈태도 부족하고, 초중고에서도 창의력과 소질 계발은 무시한 채 입시 위주의 교육만 한다. 이러니 적지 않은 MZ 세대(1980~2000년대 출생)가 아무리 지원금이 늘어나더라도 육아, 교육, 내 집 마련에 대한 부담감이 워낙 커 결혼·출산을 포기하겠다고 답한다.


젊은 층에게 좌절이 아닌 희망을 안겨줘야 할 대통령실과 정치권은 여전히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비전과 전략 부재, 정쟁, 편 가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맨슨도 얘기했지만 한국은 활력 있는 문화와 과학기술력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회복 탄력성을 가졌다. 어떤 어려움과 도전에 처하든 항상 돌파구를 찾아왔다. 수많은 외침과 경제위기 등 국난이 닥치면 항상 의병을 일으키고 금 모으기 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게 우리 국민이다.


결국 핵심은 정치 혁명이다. 이제는 정말로 사생결단식 권력 투쟁으로 인한 ‘국가 리더십의 실패’에서 벗어나 미래 지향적 정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역동적 혁신 생태계와 포용성 구축도 절실하다. 그래야 미중 패권 전쟁 속 지경학적 위험에 대처하는 것은 물론 미래 성장 동력 확충도, 교육 혁명도, 저출생 타파도, 삶의 질 개선도 꾀할 수 있다. 지속 가능 국가를 위한 노동·연금·교육·연구개발(R&D) 같은 4대 구조 개혁에도 나설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덴마크·스위스·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같은 행복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대통령실과 정치권, 정부가 이런 시대정신을 외면한다면 자칫 영상이 아닌 현실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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