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청소년에만 지원하던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을 남성 청소년에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해 온 질병관리청이 비과학적인 근거를 앞세워 무리하게 접종횟수를 줄이려고 시도하다 도마에 올랐다. 남성 청소년을 무료 접종 대상에 포함하는 대신 총 2~3회 접종해야 할 HPV 백신을 1회만 지원하려다 전문가 단체의 반발에 한발 물러선 모양새다.
31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질병청은 감염병 예방에 꼭 필요한 백신에 접종 비용 전액을 지원하는 국가 필수예방접종(NIP) 사업을 운영 중이다. 정부는 자궁경부암 예방을 위한 HPV 백신 접종의 중요성을 인식해 2016년 12세 여성 청소년부터 지원을 시작해 현재 12~17세 여성 청소년과 18~26세 저소득층 여성으로 지원 대상을 넓혔다. HPV 백신은 접종 당시 나이에 따라 2회 또는 3회 접종이 필요하다.
의료계는 HPV 백신이 자궁경부암 뿐 아니라 항문암·두경부암·구인두암 등 HPV 감염으로 유발하는 암의 90% 이상을 예방할 수 있으며 성적 접촉을 통해 감염될 수 있는 만큼 남성 청소년도 접종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현재 NIP에 포함된 ‘서바릭스’(2가 백신)와 ‘가다실’(4가 백신)보다 예방 범위가 넓은 ‘가다실9’(9가 백신)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9가 HPV 백신 남녀 무료 접종을 공약으로 내세우고 국정과제로도 포함시키면서 NIP 확대 기대감은 무르익었다.
HPV 백신은 가격이 비싼 편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가다실9’ 기준 서울 의원급 의료기관의 1회 평균 접종가는 21만7565원으로, 2회 접종을 완료할 경우 43만 원이 든다. 정해진 예산 안에서 백신 접종 혜택을 늘리기 위해 고민하던 질병청은 최근 HPV 백신 1차 접종만 국가가 지원하는 모델로 전환한 영국·호주 사례를 근거로 ‘2차 접종 무용론’을 펼친 게 의료계 비판을 불러 일으킨 발단이다.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HPV 백신을 1회만 접종했을 때의 연구 결과는 아직까지 일관성이 없으며 안전성 및 효과 검증이 추가로 필요하다”며 “HPV 백신에 대한 국가 지원을 시작한 지 20년 가까이 되어 집단면역이 충분히 형성된 영국·호주 등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질병청은 “HPV 백신의 접종 횟수, 9가 전환 등을 검토하던 중 해외 권고사항 변경에 대해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았을 뿐 구체화된 사항은 없다”는 입장이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정부가 대선 공약을 이행하고자 무리수를 뒀다가 전문가들의 반발에 부딪혀 입장을 바꾼 것 아니냐는 의혹이 짙다.
의료계 한 관계자는 “매년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NIP가 충분한 과학적 검증 없이 불투명하게 운영돼서야 되겠느냐” 며 “총선을 앞두고 효과와 안전성이 불분명한 정책이 생색내기 용도로 추진될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realglasse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