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야당의 ‘몽니’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안이 불발되자 50인 미만 사업장에 속한 880만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인 및 근로자들의 비판과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원내 지도부조차 여당의 절충안에 중대재해법 유예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86 운동권과 노동계 출신 의원들의 강한 반대로 무산되자 민주당이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을 외면하고 강성 노조의 눈치만 살피며 균형감을 상실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전날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중대재해법 유예안에 대해 서영교·김성주·강민정·이수진 의원 등 노동계·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반대를 주도했다. 이들은 “이미 시행된 법을 이제 와서 또다시 유예하는 것은 법과 원칙에 맞지 않다”는 논리를 앞세우며 사실상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한 협상안을 거부했다.
이들은 여당이 제시한 ‘산업안전보건지원청’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했다. 민주당이 중대재해법 유예 조건으로 꼽은 ‘산업안전보건청’에서 관리 감독 및 조사 영역이 빠진, 축소된 안이라고 꼬투리를 잡은 것이다. 정부·여당은 당초 “별도 기구 설치는 없다”는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고 이를 고려해 홍익표 원내대표를 비롯한 원내 지도부도 “이 정도 조건이면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는데 깡그리 무시한 셈이다.
운동권·노동계 출신 의원들의 ‘카르텔’은 단단했다. 여당의 절충안에는 “정부가 2년 뒤에 실제로 약속을 지킬지 장담할 수 없다”고 퇴짜를 놓았고 또 다른 민주당 의원은 “이미 2년이나 유예기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정부는 뭐 했느냐”며 “안전관리를 위한 아무 조치도 안 해놓고 유예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양심 없는 행동”이라고 반발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정의당 관계자들 역시 중대재해법 유예 반대 농성을 진행하며 민주당을 압박했다. 한국노총 부위원장 출신인 이수진 의원은 민주당 의총에서 발언대에 두 차례나 오르며 이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4월 총선에서 자영업자와 서민들의 표심 이탈을 우려해 “산업 현장에서 아직 법 적용 준비가 덜 됐다고 말하는 만큼 현장과의 균형 감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며 설득에 나섰지만 노조 및 운동권 의원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노동계 출신의 중진 의원까지 나서 “정부에 따질 것은 따져야겠지만 산업계의 현실은 현실대로 봐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중대재해법과는 별개 사안인 윤석열 대통령의 이태원 참사 특별법 거부권 행사 등을 언급하며 반박하는 모습도 보였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당내 다양성이 실종됐다”며 “총선을 앞두고 강경 이미지가 낙인 찍힐까 봐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이) 국민의 공당이 맞는지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면서 “총선 때 양대 노총의 지지를 얻고자 800만 근로자의 생계를 위기에 빠뜨린 결정은 선거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것으로 운동권 특유의 냉혹한 마키아벨리즘”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운동권이 민주당의 정책 기조를 장악한 데다 중대재해법 유예 법안이 두 차례나 본회의를 앞두고 좌절되면서 향후 여야 간 재협상 또한 난항이 예상된다. 정부와 여당이 한발 물러섰음에도 민주당이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은 만큼 여당으로서는 더 진전된 조건을 내놓기 어려운 처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선거를 앞두고 50인 미만 사업장에 속해 있는 880만 중소기업 근로자와 자영업자들이 지속적으로 여론전에 나선다면 민주당 또한 협상 테이블에 다시 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민주당 원내 관계자는 “산안청의 감독과 조사 기능을 강화한다면 협상에 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민주당은 이날 비례대표 제도와 관련된 사안의 결정 권한을 이재명 대표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강선우 대변인은 이날 최고위원회의 이후 기자들에게 “선거제도와 관련한 당의 입장을 정하는 권한을 이 대표에게 포괄적으로 위임하기로 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