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하면 다를까? 비전프로 성패는 [윤민혁의 실리콘밸리View]

“메타버스는 거품이다.” 테크계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말일 겁니다. 이 말에는 두가지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가상세계’가 새롭지 않다는 인식과 함께 가상현실(VR) 기기는 미래가 아니라는 냉소가 녹아 있죠.


사실 VR·AR(증강현실)·XR(확장현실) 기기 판매량은 생각처럼 빠르게 늘지 않고 있습니다. 사명을 ‘메타’로 바꾸면서까지 이 시장에 진심으로 뛰어들었던 메타는 VR 관련 부서인 리얼리티랩 구조조정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메타버스가 예전만큼 매력적인 소재가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시장에 가장 매력적인 회사가 뛰어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애플 말입니다.



애플 비전프로. 사진제공=애플

2일(현지 시간) 미국에서 애플 비전프로가 출시됐습니다. 사전예약만 20만 대를 넘어섰다 합니다. 비전프로를 사전에 접한 리뷰어들은 뛰어난 사용경험(UX)과 성능에 극찬을 보내고 있습니다. 4K 4000PPI(인치당 픽셀)에 이르는 초고해상도 렌즈 2개, 12개에 이르는 카메라, M2 칩셋은 물론 초대 아이폰에서부터 보여온 애플의 UX 집착을 감안할 때 비전·제스처 인식 또한 이전에 찾아볼 수 없던 수준일 게 분명합니다. 실제 리뷰어들도 높은 사양으로 구현한 ‘공간 컴퓨팅’과 자연스러운 사용경험에 찬사를 보내고 있죠.


하지만 이 모든 장점이 비전프로의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성패를 논하기 앞서 비전프로의 ‘성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지표가 매진이라면 비전프로는 이미 성공했습니다. 사전예약 물량도 공급이 힘들어 배송까지 한 달 이상 시간이 소요될 정도니까요. 시장분석기관 트렌드포스는 올해 비전프로 출하량이 60만 대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습니다. 아마 60만 대는 애플이 준비할 수 있는 물량의 최대치이기도 할 겁니다. 소니가 제공하는 초고성능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생산량에 한계가 있는 탓이죠.


매출이 성공을 좌우할까요. 애플은 연간 2억 대 이상의 아이폰을 팔아치우는 회사입니다. 비전프로가 ‘최소’ 3499달러에 이르는 초고가 제품일지라도 60만 대가 실적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미미합니다. 월가는 올해 애플 실적에 비전프로가 끼칠 영향이 1% 내외일 것으로 추정 중입니다. 대세에 영향이 없다는 뜻이죠.


비전프로의 성패는 단순한 판매량이 아닌 VR 생태계 조성 여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전 메타 경영진이 비전프로 출시를 환영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죠. 메타 VR 헤드셋 ‘퀘스트’ 시리즈는 총 2000만 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생태계 조성에는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현실입니다.


VR 시장은 ‘왜 VR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굳이 불편한 헤드셋을 써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용 게임은 소수이고, 가상 멀티모니터를 띄우는 ‘공간컴퓨팅’은 사용자가 한정돼 있죠. 사정이 이러하니 360도 성인물이 킬러 콘텐츠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메타를 비롯한 타 VR 기기 제조사들은 애플이 iOS 기반 콘텐츠 생태계를 열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에 iOS가 더해지며 더 많은 개발자들이 시장에 들어와주기를 바라는 것이죠. 어찌보면 자신들도 모르는 ‘해답’을 애플이 제시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AR 기능을 제공하는 메타 퀘스트3. 사진제공=메타


문제는 애플도 정답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데 있습니다. 애플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공간컴퓨팅’ 데모를 소개했지만 사실 메타 퀘스트3도 유사한 AR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야외 사용이요? 배터리와 무게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아이폰만 들고 다녀도 강도 만나기 십상인 미국에서 초고가 기기를 쓰고 다닌다는 건 ‘표적’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현실적인 사용예는 집에서, 쇼파에 앉아, 모니터와 TV로 하던 작업을 비전프로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가격도 일견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100인치 8K OLED TV는 4000만 원에 육박하니까요. 하지만 쇼파에 앉아 600g에 달하는 헤드셋을 쓰고 가상 TV를 띄워 홀로 영상을 보는 게 과연 ‘미래’일까요?


넷플릭스, 유튜브 등 영상 제공자들은 비전프로 전용 앱 개발에 관심이 없다 하죠. 벌써부터 비전프로의 ‘킬러앱’은 사파리(웹브라우저)라는 조롱도 나옵니다. 전용 게임 개발도 문제입니다. VR 게임은 구동에 높은 사양이 필요합니다. 평면에 구현하던 가상공간을 360도로 그려내야 하니까요. 최신 최고 사양 그래픽처리장치(GPU)로도 8K 일반 게임을 끊김 없이 구동하기 힘든데 이를 360도로 구현하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해상도를 낮출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꼭 비전프로여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비전프로의 성패는 ‘왜 구매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어떤 답을 주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높은 가격은 사실 얼리어답터들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소수의 얼리어답터 외 일반 소비자들에게까지 구매층을 넓히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답이 필요합니다. 니치마켓에 불과하던 PDA가 아이폰의 등장 이후 연 12억 대가 팔리는 ‘스마트폰’으로 변모했듯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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