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단체가 정부의 의과대학 입학정원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2020년 문재인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을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전공의들도 집단행동 참여 의지를 나타내면서 의료계 총파업의 전운이 고조되는 모양새다.
8일 의료계에 따르면 대한의사협회 대의원회 운영위원회는 전일(7일) 오후 8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어 의대 증원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설치를 의결했다. 앞서 의협은 정부의 의대 증원 규모가 발표되는 즉시 집행부 전원이 사퇴하고 비대위 체제로 전환해 총파업 등 단체행동에 나서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의협은 정부가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한 직후 이필수 회장이 사퇴하며 집행부 공백이 생겼다. 의협이 총파업 등 집단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엄포를 놓자 보건복지부가 보건의료 위기 단계를 ‘경계’로 한 단계 상향하고 의협에 ‘집단행동 및 집단행동 교사 금지’ 명령을 내리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당초 예상보다 일정을 앞당긴 것으로 전해진다.
의협 대의원회는 결의문을 통해 "대의원총회에서 구성한 비상대책위원회에 투쟁의 전권을 부여하고 전면적이고 강력하게 대정부 투쟁에 돌입할 것을 촉구한다"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전 회원의 동참과 대한의사협회 전 조직의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 직역의 인력을 일거에 70% 가까이 늘리겠다는 발상 자체가 아수라 같다"며 "비대위가 책임 있는 행동으로 정한 목적을 반드시 이뤄 주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임시대의원총회는 어디까지나 비대위 설치를 의결하기 위한 단계다. 비대위원장 선출을 필두로 비대위 구성을 완료하고 구체적인 집단행동을 논의하려면 설 연휴 이후에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전망된다.
의협이 주도하는 총파업 못지 않게 의료계 안팎의 이목이 집중되는 대상은 대학병원에 소속된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들이다. 전공의들은 여러 의사단체 가운데 파업 시 가장 파급력이 큰 집단으로 꼽힌다. 지난 2020년 문재인 정부가 의대 증원을 추진했을 당시 개원의 파업 참여율이 한 자릿수에 그친 반면 전공의 파업 참여율은 약 80%에 달했다. 그로 인해 외래진료에 차질이 빚어지고 응급 환자가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가 하면 암 환자 수술 일정이 미뤄지는 병원들이 속출하자 보건복지부가 백기를 들었다.
대전협은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이후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은 상태다. 다만 정부 발표를 하루 앞둔 5일 수련병원 140여 곳, 전공의 1만 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88.2%가 의대 증원 시 단체행동에 참여할 의사를 보였다고 밝히며 파업 가능성을 시사했다. 전체 전공의는 1만5000여 명 정도다. 소위 ‘빅5’로 불리는 서울 상급종합병원 5곳(서울대병원·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서울성모병원)에 소속된 전공의 가운데 단체행동에 참여하겠다는 비율은 86.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협은 오는 12일 온라인 임시 대의원총회를 열어 대응 방안을 논의할 방침이다. 빅5를 포함한 주요 수련병원들은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총파업 찬반 투표를 진행하며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아직까지 현장에서 파업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지는 않으나 병원들은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정부는 당장 다가온 설 연휴 의료대란을 막는 동시에 2020년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전공의 등 일선 의사들에게 전방위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7일 오전 전국 221개 수련병원 병원장들과 가진 비대면 간담회에서 전공의 파업 대응에 적극 협조해달라고 주문했다. 의사 집단행동 등으로 비상진료가 필요한 상황에 대비해 지방자치단체별로 비상진료대책상황실을 설치하고 대책을 수립해 달라고도 요청했다. 빅5 병원을 포함해 전공의가 많은 수련병원과 대전협 집행부가 소속된 병원에는 경찰청 협조까지 준비해둔 것으로 전해진다.
당초 의료계 일각에서는 전공의들의 투쟁 동력이 2020년만 못할 것이란 관측이 있었다. 그러나 유례 없이 전공의들을 향한 압박 수위를 높여나가는 정부의 행태가 되려 강한 반발 을 불러 일으키면서 파업 규모를 키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박민수 복지부 차관은 의료계의 파업 등 단체행동을 두고 "노조 같으면 노동 3권이 있지만 의사는 개원이든 봉직이든 집단행동 자체가 불법"이라고 발언해 의사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익명을 요한 의료계 관계자는 "집단행동이 가시화 하기도 전에 공권력을 동원해 의사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형국"이라며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파업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계의 집단행동 시 정부가 가장 먼저 동원할 카드는 업무개시 명령이다. 정부는 의료법 제59조에 따르면 의료인이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중단하거나 의료기관 개설자가 집단으로 휴·폐업해 환자 진료에 큰 지장을 초래하거나 그럴 우려가 있는 경우 업무개시 명령을 내린다. 복지부는 2000년 의약분업, 2014년 원격의료 등 역대 의료계 총파업 때마다 업무개시 명령을 발동했다. 2020년 의대 증원 추진에 반발해 의료계가 총파업을 벌였을 때도 전공의 10명이 고발된 사례가 있다. 명령을 받은 파업 참가자는 다음 날 자정까지 업무에 복귀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는데, 지난해 제정된 의료인면허취소법의 적용 대상이 되면 최대 10년까지 면허가 취소될 수 있다. 상급종합병원을 중심으로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 움직임이 포착되자 정부는 7일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비상진료계획 수립을 지시하고 수련병원에 ‘집단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을 내려 사직서를 제출하는 방식의 집단행동을 원천 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