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독일에 밀려 3위에서 4위로 한 계단 떨어졌다. 엔화 약세 지속에다 독일의 물가 상승이 맞물려 양국 간 달러 기준 명목 GDP가 벌어진 것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일각에서는 일본 경제에 고착화한 리스크 회피 경향과 이에 따른 장기 저성장이 발목을 잡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15일 일본 내각부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명목 GDP는 전년 대비 5.7% 증가한 591조 4000억 엔으로, 이를 달러로 환산하면 4조 2000억 달러(약 5600조 원)다. 이는 같은 기간의 독일(4조 4000억 달러)보다 작은 규모다.
GDP는 한 국가 내에서 생산된 물품과 서비스를 합한 수치로, 명목 GDP에는 물가 변동이 반영된다. 일본은 지난해 개인소비와 설비 투자, 수출 증가 등에 힘입어 실질 GDP 성장률이 1.9%를 기록했다. 여기에 고물가를 반영한 명목 GDP 성장률은 5.7%로 집계돼 3년 연속 플러스 성장했다. 반면 독일의 2023년 실질 GDP는 -0.3%로 경기 침체를 나타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물가가 일본 이상으로 뛰면서 명목 GDP 성장률(6.3%)은 일본을 제쳤다. 여기에 엔화 약세가 가속화한 탓에 달러 환산에 따른 일본의 GDP 규모가 줄어든 것도 순위 역전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은 1968년 당시 서독을 제치고 미국에 이은 명목 GDP 2위에 올라섰다. 2010년 중국에 밀려 3위로 떨어졌지만 달러 기준으로는 50년 넘게 독일 대비 큰 경제 규모를 자랑했다.
한편 이번 순위 역전을 놓고 일본 내 평가는 엇갈린다. 다케다 준 이토추종합연구소 연구원은 “독일의 노동 성장력이 정점을 찍고 유럽연합(EU) 확대에 따른 경제 수혜도 줄어들고 있다”며 “달러당 133엔 이상의 엔고가 되면 일본이 다시 역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본과 독일의 경제력 차이가 아니라 환율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최근 엔저가 심화하고 있는 만큼 연내 재역전을 노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일본 경제가 오랜 시간 침체를 이어온 탓에 이러한 경향이 고착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고바야시 신이치로 미쓰비시UFJ 연구원은 “일본에서는 버블 경제 붕괴 후 30년에 걸쳐 위험 회피 사고가 기업들 사이에 스며들면서 경제가 정체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주요 기업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이전하고 국내 투자를 게을리한 부작용도 반영된 결과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