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강화도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고조선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마니산 참성단과 고려시대 몽골항쟁 당시 수도였기에 역사 유적이 곳곳에 널렸다.
특히 강화도는 고인돌(지석묘)의 섬이라고 불린다. 고인돌은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됐다고 알려졌다. 강화 고인돌은 굄돌 위에 덮개돌을 올린 탁자식과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개서식으로 혼재됐다. 강화도에 간 여행객이라면 밭 한가운데 떡하니 괸돌을 올린 바위와 산길 옆에 놓인 큰 돌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자세히 보면 고인돌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 관리가 소홀할 때에는 이 같은 고인돌을 석재로 사용하면서 훼손해 유실됐을 정도다.
강화도에는 선사시대 고인돌 약 150기가 분포돼 있다. 학계에서 강화도의 고인돌을 주목하는 이유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형식의 다양성과 밀집도를 갖췄기 때문이다. 이 중 70기의 고인돌은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인천시 강화군에 따르면 강화 고인돌은 대부분 산기슭에 분포하면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이다. 해발 100~200m 사이에 많이 분포해 있다. 국내 다른 고인돌보다 평균 고도보다 높다. 이 중 고천리 고인돌군이 해발 250~350m 사이에 위치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탁자식 고인돌이 강화도 부근리에 있다. 이 고인돌은 흑운모 편마암으로 강화 고인돌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덮개돌의 무게만 약 80톤으로 높이 2.6m의 굄돌 2개가 길이 7.1m, 너비 5.5m, 두께 2.6m의 돌을 받치고 있다. 이 고인들의 원형은 4개의 굄돌이 ‘ㅁ’자 방으로 있었지만 이후 2개가 유실되고 나머지 2개의 굄돌이 덮개돌을 받친 개방된 ‘ㅠ’자 상태다.
그렇다면 부근리 이 거대한 고인돌은 어떻게 세워졌을까. 학계에서는 무게 80톤의 돌을 옮기는데 투입되는 인원은 건실한 장정 800명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에 굄돌 세우기로 200명이 더 추가되면 약 2000명의 인원이 필요하다.
이 같은 인원이 땅을 파고 굄돌을 세운 후 큰 덮게 돌을 옮길 수 있도록 주위를 흙을 굄돌 꼭대기까지 쌓아 경사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 경사면에 튼튼한 통나무를 깔고 여러 사람이 줄을 덮개돌에 묶어 끌어올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덮개돌을 받침돌 위에 덮고 주위 흙을 치우면 기본적인 고인돌 골격은 완성된다. 돌을 옮기는 데 사용하는 통나무 위에 1톤 무게 돌을 올려놓고 옮길 경우 성인 남자 약 10명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고인돌의 주인은 당시 최고권력자의 무덤 또는 제단이라고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