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있게 외쳤던 수많은 공약은 말뿐이었다. 기대했던 예산 증액은 사실상 이뤄지지 않았다. 정몽규 HDC 회장이 대한축구협회의 수장으로 집권한 11년간 한국 축구는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다.
정 회장은 이달 16일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경질을 발표하면서 “종합적인 책임은 축구협회와 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정 회장이 언급한 책임은 사퇴가 아니었다. 오히려 클린스만 감독 선임이 자신의 독단적 결정이 아니었음을 주장하면서 4선 연임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세 번째 연임 중인 정 회장의 이번 임기는 2025년 1월까지다.
정 회장은 부임 첫해였던 2013년 대한축구협회 비전 선포식에서 ‘비전 해트트릭 2033’을 발표했다. 5대 추진 목표 중 하나인 ‘경쟁력’에서 가장 먼저 내세운 과제가 2033년까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0위 진입 및 세계 주요 대회 파이널 진출이다. 목표했던 2033년까지 9년이 남았지만 현재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인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준우승, 2022 카타르 월드컵 3위를 기록한 크로아티아(10위)도 겨우 10위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간 A매치 일정 최소 6개월 전 조기 확정 및 FIFA 랭킹 30위 이내 강팀과 70% 이상 평가전도 전혀 실행되지 않고 있는 부분이다.
대표팀 경쟁력 외에도 인재 육성, 열린 행정, 축구 산업 확대, 새로운 문화 조성 등 다양한 목표를 설정했지만 이에 대한 세부 과제를 이행하기 위한 움직임은 미미하다. 오히려 역행하는 부분도 있었다. 당시 정 회장은 승부 조작, 금품 수수, 폭언·폭력 등의 근절을 위한 3대 윤리 정착 교육 및 제도를 마련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지난해 3월 승부조작범을 포함한 축구인 100명에 대한 날치기 사면을 시도했다가 팬들의 거센 비판을 받은 뒤 결정을 철회한 바 있다.
축구계의 한 관계자는 “정 회장이 부임 초기나 재선과 3선 때 제시한 공약을 살펴보면 제대로 실행되는 부분은 많지 않다. 특히 장기 프로젝트인 프로축구 1부 리그부터 아마추어 리그까지 통합 승강제 도입은 여전히 답보 상태”라며 “지난 11년간 한국 축구가 과연 건강하게 발전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재정 기여도 의문이다. 정 회장은 2013년 협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협회 예산이 1200억 원에 달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다고 생각한다”며 협회 예산을 2000억~3000억 원 수준으로 늘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대기업 총수인 정 회장의 이 한마디가 대의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 체제 11년 동안 협회의 재정 상황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임기 첫해 1235억 원이었던 예산은 이듬해 891억 원으로 줄었고 2015년에는 774억 원까지 내려갔다. 1000억 원대를 회복한 건 불과 2년 전 일이다. 올해는 1876억 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지만 그중 855억 원이 천안에 들어설 대한민국축구종합센터 건립 예산으로 책정돼 있어 전체 예산이 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결과적으로 기업 총수가 회장직을 맡는다고 해서 협회 전체 예산이 늘어난 건 아니었다. 게다가 국세청 공익법인 공시에 따르면 정 회장이 부임한 후 사재 출연한 금액은 축구사랑나눔재단 기부금을 포함한 3000만 원이 전부다. 2022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던 현대산업개발의 법인 재산으로 출연한 금액까지 더하면 총 55억 3000만 원이다. 정 회장 체제에서 11년간 협회 예산이 1조 1079억 원임을 감안했을 때 0.5%도 안 되는 금액이다. 참고로 대표팀 주장 손흥민은 2022년에 2250만 원을 기부했다.
한 관계자는 “협회 예산의 대부분은 자체 수익과 스포츠 토토 지원금, 국민체육진흥기금 등이다. 기업 총수가 회장직을 맡는다고 해서 수익에 큰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라며 “문제는 정 회장에 대항할 특별한 차기 후보가 없다는 사실이다. 축구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