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형 당뇨’ 앓는 8살, 170㎞ 도보 대장정 떠난 까닭은

■1형당뇨 앓는 8살 박율아양·아버지 박근용씨
세종서 서울 용산 대통령실까지 10박 11일 대장정
태안 일가족 비극 계기로 수면 위 오른 ‘1형 당뇨’
자가면역기전이 발병 원인…사회적 편견에 이중고

박근용 씨(왼쪽)와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율아양이 대장정 중 보건복지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환자 가족 제공

“율아야, 아빠랑 대통령 할아버지 만나러 갈래? 대신 걸어서만 가는거야.” “아빠랑 단둘이? 너무 신나요. 율아 잘 할 수 있어요. ”


세종시에 사는 박근용(47)씨와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박율아(8)양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 7일 세종시의회에서 출발해 보건복지부·식품의약품안전처·천안·평택·오산·수원·의왕·과천·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거쳐 17일 용산 대통령실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10박 11일이 걸렸다. 박 씨 부녀는 추운 날씨에도 자전거나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하루 10~20km씩 내내 걸었다. 도보 이동거리는 총 170km에 달한다.



도보 이동 중 혈당이 올라가자 박율아양이 스스로 인슐린 주사를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 환자 가족 제공

율아는 작년 7월 1형 당뇨 진단을 받았다. 당뇨병은 체내 포도당이 세포 내로 들어가 에너지원으로 이용되지 못하고 혈액 내에 쌓이면서 혈당이 비정상적으로 상승하는 질환이다. 혈당이 일정 수치 이상 오르면 소변으로 당이 넘쳐 나오는 증상이 같다는 이유로 일괄 당뇨병이라고 부르는데 유형에 따라 질병 발생 기전과 특성은 전혀 다르다. 한국인 당뇨병 환자의 대부분은 비만, 기름진 음식, 스트레스, 운동부족 등의 요인으로 인슐린 저항성이 생겨 인슐린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2형 당뇨병이다. 인슐린 저항성 정도에 따라 식이요법, 운동 등 생활습관 개선과 약물치료를 병용하면서 관리가 잘 이뤄질 경우 약물을 줄이거나 중단할 수도 있다.




반면 1형 당뇨병은 자가면역 기전 등으로 췌장의 베타세포가 공격을 당해 인슐린을 제대로 분비하지 못하면서 발생한다. 인슐린이 자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 차례 혈당을 측정하고 외부에서 인슐린을 주입하는 치료가 필수다. 팔에 부착하는 센서로 실시간 혈당 모니터링이 가능한 연속혈당측정기가 도입되며 매번 바늘로 손가락을 찌르지 않을 수 있게 됐지만 혈당 관리는 여전히 까다롭다. 주사 시기를 놓치면 인슐린 결핍으로 케톤체라는 산성 물질이 몸에 쌓여 혼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반대로 체내 요구량보다 많이 주입하면 저혈당에 빠져 실신하거나 최악의 경우 사망할 수 있다. 인슐린 주입량 뿐 아니라 외부 요인의 영향도 크다. 체력 소모가 심할 때면 혈당이 뚝 떨어지며 저혈당을 찍었다가도 간식을 먹으면 순식간에 위험수준인 230~250㎎/dL까지 치솟는다.



1형당뇨 환자와 가족들이 박 씨 부녀의 완주를 기념하며 17일 서울시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환자 제공

1형 당뇨 진단을 받은 지 1년이 채 안된 율아가 긴 여정에 동행한다는 말에 엄마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극구 말렸다. 율아 아빠의 부담도 컸다. 그럼에도 길을 나선 건 ‘1형당뇨를 앓아도 혈당조절만 잘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였다. 박씨는 22일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중간중간 여정에 동참했던 환우들과 시민들의 응원 덕분에 완주할 수 있었다”면서도 “1형 당뇨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낮은지 체감했다. 1형 당뇨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대다수 1형 당뇨 환자들은 어느날 갑자기 진단을 받는다. 중증 난치질환으로 인정받지 못해 상급종합병원에 입원 가능한 기간은 일주일 남짓. 혈당측정기 사용부터 인슐린 주사를 놓는 방법, 인슐린 작용 시간, 음식별 탄수화물(당분) 함량 등에 대해 숙지하기엔 턱없이 모자른 기간이다. 매 끼니 식사 전, 취침 전 기본 4번에 중간중간 혈당이 올라 고혈당 상태가 30분 이상 지속되면 1~2번 더 주사를 놓아야 하기 때문에 본인이 맞아야 할 인슐린양을 계산하는 것도 오롯이 환자의 몫이다. 맞벌이 가정은 어린 자녀가 1형당뇨 진단을 받으면 둘 중 하나가 회사를 그만 두고 질병 관리에 매달리곤 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평생 치료비 부담에 허덕이며 합병증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올 초 충남 태안에서 1형당뇨를 앓던 아이와 일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도 그러한 이유로 추정된다.



올해 1월 세종시에서 1형당뇨 환자들의 처우개선을 호소하기 위해 사단법인 한국1형당뇨병환우회 주최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환자와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1형 당뇨에 대한 편견은 ‘소아 당뇨’라는 용어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아·청소년기 주로 발병해 흔히 ‘소아 당뇨’로 불리지만 현실은 다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2년 1형당뇨로 병·의원을 찾은 4만4555명 중 19세 이하 환자는 3941명으로 10%에도 못 미쳤다. 연령별로는 60대가 8688명으로 가장 많고 50대(7428명), 70대(6519명), 40대(6129명), 30대(5500명), 20대(5085명) 등의 순이었다. 90% 이상이 성인 환자라는 얘기다. 드물게 성인기에 발병하거나 완치가 어렵다보니 고령 환자가 누적된다.


문제는 이같은 편견이 정부 정책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달 말부터 1형당뇨 환자들이 사용하는 당뇨 관리 기기에 대한 건강보험 지원을 이달 말부터 조기에 시행키로 했다. 주요 지원 방안을 살펴보면 인슐린자동주입기(인슐린펌프) 중 가장 고사양인 복합폐쇄회로형 모델 구입 비용을 기존 381만 원에서 45만 원 수준으로 대폭 완화하고 월 19만 원 수준인 연속혈당측정기의 환자 부담은 10만 원 수준으로 인하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다만 지원 대상이 19세 미만으로 제한돼 성인 환자는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환자 단체는 성인이 되어 낫는 병이 아닌데 지원 대상을 소아·청소년으로 제한하는 건 문제라고 지적한다. 김미영 한국1형당뇨병환우회 대표는 “지속적인 의료비 지출 부담으로 혈당 관리에 손을 놓고 합병증이 도져 어려움을 겪는 성인 환자들이 많다”며 “편견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병명을 ‘췌도부전증’으로 바꾸고 성인까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