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시장에 관심 많으신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삼성 반도체 경영진은 일본에서 무엇을 보고 왔을까?’ 1·2편에서는 삼성전자(005930)의 고대역폭메모리(HBM)와 낸드플래시 장비에 대한 일본 공급망을 살펴봤는데요. 이번에는 삼성 반도체(DS) 사업과 현지 극자외선(EUV) 소재 회사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시리즈 마지막 편입니다.
◇EUV 포토레지스트 - 네덜란드 ASML만큼 중요한 日 회사들
EUV 소재는 지난 '강해령의 하이엔드 테크' 시리즈에서도 수차례 다룬 적 있는데요. 지난달 삼성전자 경영진은 수일 간 일본 출장을 통해 현지 EUV 소재 회사 현황을 심도있게 점검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EUV 소재 중에서도 일본 공급망 내 가장 중요한 것이 포토레지스트(PR)입니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회사들이 빛을 회로를 찍는 노광 공정 직전에 웨이퍼 위에 바르는 물질인데요. 이걸 도포해야 빛(광원)과 물질이 반응해 웨이퍼에 회로 모양을 반복적으로 찍어낼 수 있습니다.
특히 첨단 7나노 이하 공정에 쓰이는 EUV용 PR은 우리나라에서 큰 이슈가 됐었던 적이 있죠. 때는 2019년. 일본 정부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트집잡아 한국으로 EUV PR 수출을 금지시키면서 ‘일본 수출규제’ 사태가 시작됐는데요. 당시 삼성전자, SK하이닉스(000660) 등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2019년은 삼성전자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EUV 공정을 파운드리 라인에 적용한 해였습니다. 일본 회사들은 당시에도 세계 EUV PR 점유율의 99%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현지에서 EUV PR을 못 구하면 7나노 이하 반도체 생산 계획이 아예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EUV PR 회사들의 힘은 약 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매우 막강합니다. 그래서 삼성전자와 일본 PR 회사들 간 관계 역시 삼성-네덜란드 EUV 노광기 최강자 ASML 사이 협업만큼 중요합니다. 취재를 종합하면 특히 삼성의 EUV PR 공급망에서는 두 일본 회사가 강세입니다. JSR과 신에츠화학인데, 각 회사들의 특징을 좀더 들여다보겠습니다.
우선 JSR은 삼성전자 10나노급 3~5세대 D램 제조에 활용되는 EUV PR 분야에서 압도적인 선두입니다. JSR은 일본 수출 규제 이후 움직임이 상당히 재밌습니다. 2019년 규제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우회로를 만들어 삼성과 협업한 사례 때문인데요. JSR은 벨기에 반도체 연구허브 imec과 공동 출자해 만든 RMQC라는 법인에서 EUV PR을 한국으로 우회 수출하기 시작합니다. 관세청에 따르면 일본 수출 규제가 해제된 지난해에도 벨기에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EUV PR만 30톤이 넘습니다. 수출 규제의 덫에 걸린 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다변화를 확실히 한 모양새죠?
JSR의 기세와 방향성은 무섭습니다. 현재 반도체 회로가 3나노미터 이하로 축소되면서, 기존 화학증폭방식(CAR) PR을 넘은 혁신적인 형태의 포토레지스트가 나타나야 하는 상황인데요. non-CAR 방식의 대표 주자로서 금속산화물 포토레지스트(MOR) 원천 특허를 보유한 인프리아를 인수하며 EUV PR 업계에서 영향력을 넓히기도 했습니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신에츠가 삼성 EUV PR 공급망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에츠는 대만 TSMC의 주요 EUV PR 공급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삼성이 파운드리 세계 1위 TSMC를 바짝 쫓아가는 위치에 있는 만큼 TSMC의 EUV PR 거래선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죠.
경계현 사장과 삼성 반도체 경영진이 이번 일본 출장 중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력한 장소로 신에츠의 나오에츠 공장이 지목됩니다. 나오에츠 공장은 신에츠가 포토 레지스트를 생산하는 라인이 있기도 하고요, 반도체 소재를 종합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R&D 설비도 잘 갖춰져 있다고 합니다. 신에츠는 이곳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 웨이퍼, 사업 확장에 공을 들이고 있는 EUV 블랭크마스크 등 우수한 소재 보유 현황을 삼성 경영진과 공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밖에도 일본 전통의 강자들이 한국에서 EUV PR 생산 현지화를 한 사례도 있습니다. 스미토모화학은 2021년 한국 한국 법인 동우화인켐에 100억엔(약 1000억원) 신규 라인을 투자한다고 발표했죠. 스미토모와 동우화인켐은 이듬해인 2022년 한국에서 EUV PR 제품을 첫 출하해 삼성에 공급했습니다. TOK는 인천 송도 공장에서 신에츠, JSR이 차지하고 있는 압도적인 EUV PR 점유율을 가져오기 위해 매진하고 있죠.
물론 일본 회사 기술력을 추격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PR 업체인 동진쎄미켐(005290)이 최근 삼성 EUV PR 공급망에 진입해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업체의 고급 PR 기술 경쟁력과 섬세함을 따라가려면 아직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또 미국 소재 회사 듀폰이 2019년 일본 수출규제 사태 때부터 삼성 EUV PR 공급망에 진입하기 위해 분전하고 있는데요. 현재 삼성과의 적극적 협업으로 기술 수준을 상당히 끌어올린 것으로도 전해지지만, 상용화에 5년 이상 시간이 소요되고 있는 점을 미뤄보면 일본 소재 업체들이 얼마나 대단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삼성의 일본 공급망 관리…첨단 반도체 씬(Scene)에서 더욱 중요
지금까지 3편의 기사를 통해 삼성전자와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과의 관계와 최신 트렌드를 살펴봤습니다. 일본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을 딱 한 단어로 요약하면 '안정성'이 될 것 같은데요. 특유의 장인정신으로 원료와 부품부터 완성된 형태의 제품까지 아주 촘촘한 자체 공급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호황의 시대가 오면 소·부·장 생산 지연 문제가 어김없이 일어나곤 하는데요. 일본 업체들은 잘 꾸려진 공급망을 기반으로 한 리드타임 최적화로 삼성 경영진들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최근 세계에서는 반도체 '전쟁'으로 불러도 될 만큼 국가 간 첨단 칩 제조 기술 선점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죠. 일본도 아주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대만 TSMC는 일본 정부와 현지 대기업들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구마모토에서 공장 가동을 시작했고요. 일본 굴지의 기업들이 연합해 만든 라피더스라는 회사는 2027년까지 2나노 반도체를 생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일본이 반도체 제국의 재건을 꿈꾸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현지 핵심 파트너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가져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데요. 삼성전자가 일본 회사들과 끈끈한 기술 협력은 물론 적극적인 생산 현지화를 추진해 ‘칩 워’에서 우위를 지켜나가기를 기대하면서 이번 시리즈를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