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품은 인천 문학산성 [인천 톡톡]

둘레 577m, 평균 높이 1.5m의 백제 초기 축조
1986년 12월18일 인천시기념물 제1호 지정

인천시 미추홀구 문학동·학익동과 연수구 연수동 일원에 걸쳐있는 문학산성은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다. 높이 213m의 문학산 산정부를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으로 에워싼 백제시대의 석축산성이다. 출처=인천시 미추홀구


해발 217m의 인천 문학산은 높지 않은 산임에도 인천항과 남동구, 연수구 등 인천 전역의 조망이 가능한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고구려 주몽의 아들 비류가 왜 인천 문학산 일대에 나라를 세웠는지 알만하다. 그래서 인천의 주산이라고 불린다. 문학산 일대는 비류가 죽고 동생 온조가 형의 백성까지 거두면서 백제의 땅으로 흡수된다.


여기 문학산에는 둘레 577m, 평균 높이 1.5m의 산성이 있다. 문학산성이라고 불리는 이 산성을 학계에서는 백제 초기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97년 문학산성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백제의 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조사에서 삼국시대에 축성됐고 미추왕릉으로 전하는 곳이 문학산성 내에 있으며, 특히 백제의 다른 성과 축성 기법이 유사하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백제의 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문학산성에 대한 기록은 옛 문헌에도 여러 차례 나온다.


동서강목과 여지도서 등에 따르면 문학산 일대는 비류가 조성한 도읍지로서 석상터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문헌에 따르면 문학산 지형을 이용해 쌓은 이 산성은 흙으로 쌓은 100m의 토축으로 된 내성과 돌로 쌓은 200m가량의 석축으로 된 외성으로 축성됐다고 추정된다.


문학산성은 세종실록지리지와 같은 조선 전기 관찬 지리지에서는 이곳을 남산이라 불러 남산석성으로, 또 남산에 위치한 옛 성이라고 해 남산고성이라고 불렸다. 또 고을 이름을 따서 인천산성이라는 명칭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비류가 도읍지로 정한 미추홀이 지금의 인천이라고 언급한다. 문학산 위의 비류성터와 비류정이라는 우물을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미추홀이 백제 인천시대의 지명임을 고려하면 이 문학산성은 인천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다. 2018년 7월 문학산 일대를 행정구역으로 하는 인천시 남구가 행정명칭을 미추홀구로 변경해 사용 중이다.


문학산성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 12월 18일 인천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문학산성을 포함한 문학산 정상부를 시민들이 오고 간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인천 전체의 조망권을 갖춘 군사요충지로서 1962년 정상부에 미군 방공포대가 주둔하면서 민간 출입은 철저히 통제됐다. 1979년 미군의 뒤를 이어 우리 공군이 들어서도 시민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이후 민선6기 인천시가 출범하면서 국방부와 군에 이곳 정상부 개방을 추진하게 된다. 결국 문학산은 2015년 10월15일 50년 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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