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식 대책'만 반복…저출생 컨트롤타워에 실질 권한 줘야

[저출생 이것부터 바꾸자-② 사업 구조조정]
◆ 관련사업 22% '목적과 무관'
저출생 꼬리표 달면 사업보전 유리
AI 교과서·대입 정책까지 포함시켜
핵심대책 위주 큰 기조 설정해야
저고위에 예산·인사권 부여 필요

지난달 13일 폐교한 서울 광진구 화양초등학교. 연합뉴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발간한 ‘2023년도 저출산·고령사회 중앙부처 시행 계획’에서는 청소년 인터넷·스마트폰 과도 의존 예방 및 해소가 저출생 대책의 하나로 제시돼 있다. 이 사업은 청소년의 균형잡힌 성장을 위해 이용 중독에 빠질 수 있는 위험군을 찾아내 적절한 상담과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초등학교 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진단 조사도 벌인다. 국책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청소년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라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이 사업을 통해 출생아가 늘어나리라고 생각하지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실제 서울경제신문이 4일 중앙부처 시행 계획을 전수 조사한 결과 저출생 대책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부족한 사업이 다수였다. 저출생 대책으로 제시된 사업 중에는 ‘인공지능(AI) 디지털 교과서 도입’ 사업도 있다. 2025년까지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하기 위해 시범 교육청을 선정하고 개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 뼈대다. 저출생 상황 극복과 관련성을 찾기 어렵지만 국정과제이자 교육부 10대 핵심 정책이라는 이유와 함께 저출산·고령화 정책 시행계획에 이름을 올렸다.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는 “저출생 꼬리표가 달리면 부처 입장에서는 사업 유지 측면에서 유리한 부분이 있다”며 “저고위도 별다른 권한이 없다 보니 각 부처의 대책을 한데 모아 보여주는 백화점식 대책만 반복하고 있다”고 전했다.


저출생 대책 중에는 대입 정책도 있다. 각 대학 학생부 종합 전형의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입학 전형 자료에서 자기소개서를 제외하고 사회 통합 전형 모집 비율을 규정하는 내용 등이다. 장기적으로 입시 경쟁을 완화해 출산에 대한 사회 인식과 부담을 낮추려는 의도라고 볼 여지가 있지만 정부는 당장 이듬해 입시 정책에 초점을 맞췄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이나 직장 내 괴롭힘 근절도 저출생 대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시행계획에 포함됐다.


단순 인증 제도나 포상과 관련된 사업도 들어가 있다. 고졸 채용 성과가 뛰어난 기업을 ‘인적 자원 개발 우수 기관’으로 인증하거나 세대 간 소통 활성화를 위해 효행자 및 효 기여 단체에 포상을 하는 식이다.


전문가들은 저출생이 심각한 상황에서 이 같은 보여주기식 대책은 시급히 구조조정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은 0.65명으로 처음으로 0.6명대에 진입했다. 이대로라면 올해 연간 합계출산율도 0.6명을 찍는 것이 확실시된다. 정책의 회임기간을 고려하면 남은 시간이 많이 없다는 뜻이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런 정책들도 몇 단계 거쳐 연결시키면 저출생 대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이런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저고위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저출산·고령화 정책을 ‘5대 핵심 과제’로 추렸다. 구체적으로 △질 높은 돌봄과 보육 △부모에게 아이와 함께할 시간 보장 △가족 친화 주거 서비스 △양육 비용 경감 △건강한 아이 5개 과제를 핵심 정책 분야로 지정해 이를 반영한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 계획(2021~2025)’을 새로 마련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정부 안팎에서는 지금까지의 저출생 정책의 효능이 낮고 나열식 정책이 반복되는 이유로 저고위의 권한 부족을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이 때문에 파격적인 저출생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저고위의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이상림 보건사회연구원 인구모니터링평가센터장은 “저출생 대책을 작은 사업 단위로 모아 보지 말고 핵심 대책 위주로 큰 기조를 설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정부에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관련 인력을 저고위가 흡수하는 방안도 아이디어로 거론된다. 이 교수는 “시행 계획은 정책적 목표와 수단을 명확히 해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각 부처가 제출한 것을 모은 형태”라며 “지금의 (저고위) 구조로는 저출생 대책에 선택과 집중을 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스스로 책임을 가질 수 있는 정책 기구가 돼야 한다”며 “(저고위가) 저출생 대책을 그냥 묶어서 내는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기적으로는 저고위가 저출생 관련 예산과 인사권을 보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백화점식 대책과 실효성 부족한 사업을 정리해야만 한다”며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특정 부처에 업무가 집중된 게 아니라 모든 부처 사업과 다 연계돼 있는 만큼 컨트롤타워가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모든 부처의 사업을 꿰뚫고 있으면서 예산을 편성·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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