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경쟁자’가 된다면 운동장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죠.”
최근 반도체 학계 관계자에게 국가별 반도체 경쟁 현황에 대해 묻자 이 같은 답이 돌아왔다. 미국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들을 중국을 견제할 조력자로서 활용해왔지만 이러한 구도가 빠르게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정부의 자국 우선주의 토양에 인공지능(AI) 산업 팽창이라는 씨앗이 뿌리내린 결과다.
인텔의 첫 파운드리 포럼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예고편 같았다. 마이크로소프트(MS)·오픈AI·메타 등 빅테크들의 수장이 앞다퉈 인텔의 우군을 자청했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 정부의 반도체 정책을 총괄하는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인텔은 미 반도체 산업의 챔피언”이라며 노골적으로 밀어줬다. 전폭적인 지원에 화답하듯 인텔은 2030년까지 삼성전자를 제치고 세계 2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미국 반도체 보조금의 다음 지급 대상도 인텔이 유력하다. 삼성전자는 미 텍사스 테일러에 170억 달러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지만 아직 보조금을 받지 못했다.
기술 추격도 매섭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만년 3위’를 지키던 마이크론은 고대역폭메모리(HBM) 5세대 제품인 HBM3E 양산 소식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보다 먼저 전했다. D램과 낸드에 이어 AI 메모리 시장에서도 주도권을 빼앗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겪은 선례를 우린 이미 봤다. 1980년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일본 반도체는 플라자합의와 미일 반도체 협정을 거치며 고사했다. 러몬도 장관의 “대만과 한국에 넘어간 반도체 주도권을 미국이 가져와야 한다”는 발언이 허풍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생존 방안을 묻자 의외로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결국 ‘슈퍼 을’이 되는 것이죠.” 메모리뿐 아니라 AI 반도체 시장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HBM같이 메모리와 AI를 잇는 가교 성격의 제품에서 주도권을 챙겨야 한다. 기술력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퍼즐 조각은 국가적 지원으로 메우는 수밖에 없다. 규제·세제 개선과 인프라 지원, 인력 양성까지 손길이 닿아야 할 곳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