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初代) 이승만 정부가 남긴 성과는 상당 부분 과소 평가돼 있으면서도 또 일부분은 과대 평가돼 있다.
최근에서야 당시 농지개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의의를 짚어보는 움직임이 있지만 1950년대 경제 정책과 상황을 제대로 짚어보는 시도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195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산업화 정도는, 수출 실적은 과연 어땠을까. 당시 실패한 경제 정책이 있지는 않았을까. 역사적 사실과 통계, 데이터에 근거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간다.
우선 반드시 봐야 할 통계 몇 가지. 1950년대 한국 경제는 심각한 수출 감소 현상을 겪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공업화와 경제 성장은 일부 이뤄내는 모습을 보였다.
① 수출 감소: 1953년 3959만 달러였던 수출액은 1958년 1645만 달러로 58.4% 감소.
② 무역 불균형: 1952년~1960년 총 수입액은 29억 7157만 달러로 동기간 총 수출액 2억 2377만 달러의 13.3배.
③ 공업화: 1953년~1961년 제조업 생산량은 연평균 11.5% 증가.
④ 경제 성장: 같은 기간 국내총생산(GDP)도 실질 기준으로 연평균 4.1% 성장.
※통계 ①, ②는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감’(1961), 한국은행 ‘경제통계연보’(1962), ③, ④는 한국은행 ‘국민소득계정’(1984) 참고.
두 통계는 모두 사실이다. 수출이 줄어드는데 공업화는 꾸준히 이뤄졌다. 10년 가까이 수입액이 수출액의 10배를 넘는데 외환위기는커녕 경제 성장이 지속됐다. 이 혼란스러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핵심 키워드가 있다. 이는 곧 이번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경제 원조’ 그리고 ‘수입대체공업화’. 1950년대 한국 경제는 이 두 키워드로 사실상 정리할 수 있다. 수입대체공업화부터 당시 상황을 들여다본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 이명박 정부는 ‘시장주의’. 각 정부는 집권 기간을 관통하는 경제 정책을 가지고 있다.
이승만 정부의 역점 정책은 수입대체공업화였다. 수입대체공업화란 무엇인가. 영어로는 ‘Import(수입) Substitution(대체) Industrialization(공업화 또는 산업화)’다. 말 그대로 수입에 의존하는 공산품을 국산화하며 산업화를 이루는 전략이라 볼 수 있다.
당시 한국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자. 일제로부터 해방돼 주권을 찾았지만 기술과 전문 인력이 같이 빠져나간 탓에 생산 시설 가동률은 떨어졌다. 이후 전쟁이 발발해 공장 등 생산 시설의 약 절반, 사회간접자본(SOC)의 90%가 파괴되고 만다. 인구 대부분이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고 국가 주 산업은 농업이었다. 경제 선진화는 곧 결국 국민 한명 한명이 배불리 먹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고, 집에 전자기기를 놓고, 좋은 옷을 입는다는 것. 그런데 모든 관련 제품을 수입해야 했다. 외화가 있어야 하지만 낮은 부가가치 제품을 주로 수출하니 만성 달러 부족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 처한 저개발국이 많이 선택하는 산업화 전략이 바로 수입대체공업화다. 수입에 의존하는 각종 공산품을 직접 만들려 하는 것이다. 자동차, 전철, 공장 기계, 건설 원자재 같은 것을 직접 만들 수만 있게 되면 달러가 부족할 이유도 없고 국민 생활도 윤택해진다는 계산에서다. 이 수입대체공업화를 시도한 국가는 대표적으로 남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 1950년대 인도 등이 있다. 당시 한국도 이 정책을 시도했다.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덧붙이면, ‘수출제일주의’로 알려진 박정희 정부도 초기에는 수입대체공업화를 추진했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다. ‘무슨 돈으로 공장을 짓고 제조 기술과 노하우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국가에 천연자원이 많다면 질문에 답을 내기는 쉬워진다. 예를 들어 석유가 다량 매장돼 있으면 그것을 세계 시장에 팔아 외화를 확보하면 된다. 확보한 외화는 공장을 짓고 첨단 제조 장비를 구입하는 데 쓴다. 기술을 발전시키고 인력을 투입하면 공장을 돌릴 수 있다. 이 예시에 부합하는 대표 사례는 남미의 여러 국가들이다. 그런데 자원이 없다면? 1950년대 한국은 그렇다 할 자원이 없었다. 기껏해야 중석(텅스텐) 정도를 수출해 외화를 벌었다. 이것으로 수입대체공업화를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나타난 존재가 있다. 미국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는 1945년~1961년 총 31억 3730만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한국에 제공했다. 앞서 살펴본 통계에서 1952년~1960년 총 수입액이 29억 7157만 달러라 했으니, 기간은 다르지만 원조 규모가 짐작이 된다. 국제 원조는 사실상 미국 원조였다 봐도 무방하다. 앞서 살펴본 통계에서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회계상으로 훨씬 크게 기록된 것은 원조 때문이다. 이때 미국 원조는 종류·시기별로 △GARIOA(1945년~1949년) △ECA-SEC(1949년~1953년) △FOA-ICA(1953년~1961년) △PL480(1956년~1970년대까지)로 구분된다.
미국이 제공한 무상 원조 규모와 영향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추산에 따르면 1954년~1961년 국내 투자액 1823억 원 중 68.7%가 ‘해외 저축’에서 왔는데, 이는 회계 구분상 저축이라 한 것이지 사실상 원조였다.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계산에서는 사회간접자본(SOC)과 공장을 구축하고 기계·설비를 구입하는 등 ‘고정자본’ 형성에 원조가 미친 영향이 약 90%로 추정된다. 당시 국내 저축을 다 합친 것보다 미국 원조 금액이 2~3배 많았다는 분석도 있다. 또 원조는 당시 총 외환 수입의 72%(수출은 7%)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한국의 산업화를 위해’ 원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하지만 의도가 어찌됐든 미국 원조는 국내 산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 정부는 원조 방식을 두고 많은 갈등을 겪었다. 6·25전쟁 정전 협상 때처럼 갈등이 폭발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첨예한 갈등이었다. 한국은 공장을 가동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생산재’를 원했다. 당시 한국이 국산화를 시도할 만한 산업으로는 섬유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적과 실로 천을 짜내는 방직 산업이 있었다. 두 산업에는 생산 장비는 물론 원면(原綿·가공하지 않은 솜)과 같은 원자재도 필요했다. 한국은 이런 생산재를 받아 산업화를 이루고 싶어 했다. 반면 미국은 한국 국민들이 일회성으로 쓰는 소비재를 주려 했다.
미국이 소비재 중심으로 원조를 제공하려 한 것은 당시 경제·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미국은 한국 사회 안정을 원했다. 해방 직후와 전쟁통에는 당연히 구호 물품 위주로 원조를 제공했고 이후 이승만 정부가 수입대체공업화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을 때도 사회 안정이 우선이라 봤다. 한국은 전쟁 비용 상당 부분을 통화량 추가 발행으로 조달해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상황이었고 생산 시설이 거의 없는 까닭에 각종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통화량 증가로 물가가 오르는데, 물품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물가가 더 오르는 상황. 미국은 소비재 원조로 물품 공급을 늘려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봤다.
한국과 미국 간 치열한 줄다리기 끝에 원조 물품 비율은 1950년대 생산재 30%, 소비재 70% 정도로 유지됐다. 보다 엄밀하게 보면 한국 정부가 수립한 경제 개발 정책 ‘부흥계획’에 따라 사용처가 정해져 있는 ‘계획 원조’ 물량이 27%였고 그렇지 않은 ‘비계획 원조’가 73%였다. 계획 원조에 소비재가 있는 경우가 있었고 비계획 원조에 생산재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미국은 원조 물자 유용을 방지하고 기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한국은행에 원조 전용 회계 계정을 따로 만들고 여기서 돈을 쓸 때는 미국 허락을 받도록 했다. 이 같은 제도를 ‘대충자금(對充資金)’ 제도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어떻든, 그리고 방식이 어떠했든 막대한 물량의 원조가 미국으로부터 제공돼 1950년대 한국 경제 안정과 성장 모두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원조 물량이 다량 들어오고 한국 정부가 이를 활용한 공업화를 도모하면서 산업화의 싹이 텄다.
이승만 정부는 제한된 정책 환경 속에서 최대치의 성과를 내기 위해 각종 노력을 했다. 미국 허락을 받고 원조 물자를 민간에 판매한 금액은 대충자금(對充資金) 특별회계에 쌓였는데 정부는 이 자금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투자, 융자 사업을 진행했다. 도로, 항만, 수도, 전기 등 기본적인 사회간접자본을 갖춰 경제 성장 토대를 다지려 했고 수입품을 대체할 수 있는 기업에 투자와 융자를 집행해 기업 성장도 도우려 노력했다. 대충자금(對充資金) 기반 정부 투·융자는 당시 정부 일반 회계의 30%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런 정책 수혜를 본 대표적인 산업이 면방직, 제분, 제당업을 중심으로 한 소비재 경공업이다. 특히 방직업은 해방 이전 구축된 공장 시설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미국 원조 상당 부분이 솜, 즉 원면(原綿)으로 왔다. 또 정부가 대충자금(對充資金)으로 각종 투자, 융자 사업을 지원했고 국내 의복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업 환경이 그 어느 업종보다도 좋았다. 때문에 관련 문헌(정윤형, 한국경제의 전개과정, 1981)을 보면 1958년을 기준으로 국내 방직·방적 기업 수은 44개로 당시 전체 대기업 115개 중 38.3%에 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멘트 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화학 공업에서도 주목할 만한 진척이 있었다. 정부는 일제가 38선 이남에 남기고 간 국내 유일 시멘트 공장 삼척시멘트를 원조 자금을 활용해 보수한 후 민간에 유상으로 판매했다. 같은 시기 경북 문경시에는 대한양회 문경공장이 설립됐다. 의지와 자본을 가진 민간 기업이 경영을 맡자 생산량은 눈에 띄게 늘어나 결국 시멘트의 국내 자급이 가능해졌다. 대한양회 문경공장은 현재 쌍용C&E가 됐고 삼척시멘트는 민간 불하(拂下) 때 동양시멘트로 사명을 바꾼 뒤 발전을 거듭해 지금의 삼표시멘트가 됐다.
이승만 정부가 강하게 추진한 수입대체공업화는 국내 산업화 씨앗을 뿌렸지만 부작용과 한계도 작지 않았다.
우선 언급할 부분은 수출 감소다. 글을 시작하며 살펴봤듯 우리나라 수출은 1953년~1958년 5년 동안 무려 58.4%가 감소했는데 원인을 수입대체공업화에서 찾는 시각이 꽤 있다. 당시 정부는 인위적으로 우리나라 통화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저환율 정책을 유지하면서 자본재, 중간재, 원자재 가격을 낮췄다. 시장 가치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들어오는 기계·설비를 배정받기만 하면 높은 관세로 장벽이 세워져 있는 국내 시장에서 돈을 버는 것은 땅을 짚고 헤엄치듯 쉬웠다. 정부는 여기에 수입 대체 기업에게 시장 금리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정책 금융까지 제공했다.
국내에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쉽게 돈을 벌게 되면 해외 진출을 감행할 유인이 작아진다. 당시 정부는 각 기업이 확보해놓은 시설·설비 수준을 기준으로 원조 물품을 배정했기에 특혜를 유지하려면 계속 생산 설비만 늘리면 됐다. 이런 인위적 독점 환경 속에서 생산성은 경시될 수밖에 없었다. 생산성이 높아지지 않으니 물품별로 수출 경쟁력이 생길리 만무했고 1950년대 후반이 되니 수출은 안 되는데 생산물은 쌓여 국내에 공급 과잉 현상이 일어났다. 저환율과 물자 특혜 배정을 주 특징으로 하는 수입대체공업화가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부작용이다.
환율도 수출 감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단언하기 어려운 문제다. 당시 정부는 공식 환율인 ‘공정환율’ 외에도 ‘수출환율’ 등을 따로 책정하는 ‘복수환율제’를 운영했다. 수출을 하기만 하면 수출환율을 활용해 나쁘지 않은 조건으로 국내 통화로 환전할 수 있었기에 환율이 수출에 부정적 영향을 줬다고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이승만 정부는 복수환율제 외에도 수출 진흥을 위해 1955년부터 수출 보조금 제도를 운영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하기도 했다. 결국 문제는 수출 유인 부족에 따른 생산성 답보였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부정부패다. 인류 역사는 정부가 시장에 깊이 개입해 자원 배분을 직접 하게 되면 부정과 부패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을 수많은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부정부패는 말단 공무원에게서부터 정책 결정권자, 그리고 수혜 기업인까지 관료·정치·경제 집단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승만 정부와 집권 자유당 고위층이 개입한 대표 사례만 살펴봐도 △중석불 사건(1952년) △국방부 원면 부정사건(1956년) △산업은행 연계자금 사건(1958년) △금융오직 사건(1959년) 등 다양하며 정도가 심각하다.
한국 경제가 비로소 고도 성장기를 맞이한 것은 1960년대다. 그렇다면 1950년대는 전쟁과 고도 성장기 사이를 이어준 연속기(連續期)기인가 아니면 단절기(斷絕期)인가.
과거 주된 시각은 단절기 쪽에 맞춰졌다. 1950년대 후반 수입대체공업화가 한계에 직면하고 미국 원조마저 차관 형태로 바뀌면서 국내 경제는 큰 혼란을 맞았다. 원조에 의존해 수입 제품 국산화를 추구하는 정책 자체가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여기에 이후 박정희 정부가 강하게 추진해 기념비적인 성과를 남긴 수출주도공업화 전략은 1950년대와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1950년대 한국 경제 정책과 상황은 부정적 평가를 받는 것에 앞서 오랜 기간 ‘무시돼왔다'고 봐야 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이 시기를 연속기로 평가하려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수입대체공업화를 따른 남미 국가 실패를 아는 지금 과거를 재단하기는 쉽지만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별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남아 있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원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수입품의 국산화 또한 이때 추진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또 1950년대 형성된 경공업이 1960년대 후반 들어 수출 일등공신이 된 측면도 강조되고 있다.
결국 사실과 데이터는 한국이 1950년대 공업화 첫 발을 뗐으나 이 과정에서 수출 감소, 부정부패 등 부작용도 작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종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이덕연의 경제멘터리] 4회로 계속.
※4회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 정부 경제 정책과 당시 상황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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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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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년, 한국경제성장사 중 “제 9장 해방, 분단, 전쟁과 원조경제”(해남, 2023)
이영훈, 한국경제사 2: 근대의 이식과 전통의 탈바꿈 중 “제 10장 독립”(일조각, 2016)
이대근, 최상오 등, 새로운 한국경제발전사: 조선후기에서 20세기 고도성장까지 중 “제 11장 외국원조와 수입대체공업화”(나남출판, 2005)
박종철, 한국의 발전전략 중 “4장 1공화국의 국가구조와 수입대체 산업의 정치구조”(한국학술정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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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 이승만 정부의 산업정책과 렌트추구 그리고 경제발전(세계정치,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