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등에 업은 ‘칩 아메리카’의 맹공이 거세다. 미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인 인텔은 최근 1.4나노급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정 스펙을 최초로 공개했다. 지난달 1.8나노 칩 양산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성능을 15% 더 올린 차세대 공정에서도 진전을 과시한 것이다. 내년에 2나노 공정을 양산할 계획인 삼성전자보다 앞선 기술 로드맵이다. 2030년까지 파운드리 시장 2위인 삼성전자를 제치겠다는 인텔의 위협을 허풍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됐다. 얼마 전 메모리 분야에서도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세계 최초로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3E) 양산을 발표해 충격을 준 바 있다.
미국 반도체 산업 약진의 배경이 된 것은 “실리콘(반도체)을 다시 실리콘밸리로”를 외치며 팔을 걷어붙인 미국 정부의 지원 정책이다. 거액의 보조금을 내건 정부와 기업들이 ‘원팀’으로 펼치는 협공이 성과를 내고 있다. 중국·일본 등도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인텔은 미 정부와 최대 100억 달러 지원안을 놓고 논의 중이다. 지난해 중국·일본 정부로부터 약 2조 원의 보조금을 확보한 대만 TSMC는 미국에서도 6조 원 이상 보조금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우리 기업들의 보조금 소식은 아직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고군분투하는 K반도체로서는 힘에 부치는 상황이다.
우리 정부와 정치권도 ‘반도체 육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야는 4·10 총선을 앞두고 ‘반도체 규제 원샷 해결’ ‘반도체 초강국 마스터플랜 수립’ 등 그럴 듯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대전 속에서 주요국들이 전폭 지원 속도전을 펴고 있는데 우리 정치권은 “총선 후 지원하겠다”는 한가한 공약 타령만 할 때가 아니다. 백 마디 공약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정책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만기 연장, 클러스터 설립 규제 철폐, 추가적인 세제·금융 등 전방위 지원은 선거와 무관하게 하루빨리 추진해야 할 과제들이다. 미국의 보조금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에서 우리 기업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정부의 정교한 외교적 노력도 필요하다. 반도체 공약이 공약(空約)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약속임을 행동으로 보여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