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찾은 경기도 의왕시의 한 지식산업센터 현장은 늦은 오후 시간대에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HDC현대산업개발이 시공을 맡은 이 현장은 지난달 말 입주가 예정됐으나 공정률이 약 70%에 그친 탓에 입주가 5월 말로 미뤄졌다. HDC현대산업개발이 준공일을 3개월 뒤로 잡은 것은 이 현장의 지급보증 기한이 5월 말이기 때문이다. 시행사와의 계약에 따르면 5월 말까지 입주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HDC현대산업개발은 시행사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채무를 인수해야 한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지난해 12월에도 경기도 안성 물류센터 현장의 책임준공 기한을 지키지 못해 채무를 인수한 바 있다.
1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원자재와 근로자 수급 등의 여파로 예정된 준공일을 맞추지 못하는 현장이 전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부 시공사는 준공 지연으로 책임준공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서 시행사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채무를 인수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법정관리에 빠지는 경우까지 등장하고 있다.
책임준공 미이행으로 인한 채무인수 사례는 공시된 경우만 6건에 달한다. HDC현대산업개발이 지난해 12월 경기도 안성 물류센터의 책임준공 기한을 준수하지 못해 995억 원 상당의 채무를 인수했으며, 까뮤이앤씨도 강원도 양양 생활숙박시설의 책임준공 기한을 어겨 402억 원의 채무를 인수했다. 이 밖에 범양건영은 지난달 말이었던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오피스텔 현장의 책임준공 기한을 맞추지 못해 322억 원 상당의 채무를 인수한다고 밝혔으며, 금호건설은 지난달 중순이었던 수원시 오피스텔 현장의 책임준공 미이행으로 612억 원의 채무를, 동양은 충북 음성 물류센터 현장의 책임준공 미이행으로 인해 1800억 원의 채무를 인수했다고 공시한 바 있다.
책임준공이란 시공사나 신탁사가 계약에 따라 정해진 기간 내에 책임지고 공사를 완료하겠다는 것으로, 책임준공 기한을 준수하지 못할 경우 시공사는 시행사의 채무를 인수한다. 금융기관은 이를 믿고 해당 사업장에 자금을 빌려준다.
채무 인수가 반드시 시공사의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채무를 인수한 시공사는 통상적으로 해당 사업장을 매각하거나 분양을 완료해 자금을 회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다. 지금처럼 시장이 경색돼 매각이나 분양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는 시공사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채무인수가 도화선이 돼 건설사가 무너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법정관리를 신청한 새천년종합건설이 대표적이다. 새천년종합건설은 지난해 11월 말이었던 경기도 평택 물류센터 책임준공 기한을 준수하지 못해 약 800억 원의 채무를 인수한 것이 법정관리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의 2022년 매출액은 1900억 원으로,이 같은 채무를 떠안을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천년종합건설은 '아르니'와 '천년가' 등 공동주택 브랜드를 보유한 도급순위 105위의 중견 종합건설사다. 하지만 2022년 말 화물연대 파업과 자재 수급 문제 등이 겹치면서 공사가 지연된 데다가 공사비 상승으로 미수금까지 크게 불어나 더 이상 사업을 이어갈 수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준공지연 물량이 수만 가구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올투자증권에 따르면 한국부동산원과 부동산R114가 전망한 지난해 입주 물량은 44만 2000가구(아파트 기준)였으나, 실제 입주 물량은 약 36만 1000가구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예상했던 수치보다 약 8만 1000가구나 입주가 미뤄진 것이다. 이는 아파트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실제 준공 지연 물량은 이를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박영도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화물연대 파업 등으로 인한 원자재 수급 외에 코로나19의 여파로 외국인 근로자 수급이 특히 어려웠다”며 “이런 와중에 인건비까지 급등하며 흔히 이뤄지던 돌관공사가 막혔고 결국 많은 현장의 공기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돌관공사란 준공을 앞두고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해 많은 인원을 투입시켜 진행하는 것을 뜻한다.
수분양자들은 시공사가 준공 지연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공사를 진행하는 등 무리하게 작업을 진행한다고 우려하고 있다. 의왕 지식산업센터의 한 수분양자는 “12월 중순에 5층까지만 올라왔던 건물이 지난달 중순 10층까지 올라왔다"며 "날짜만 맞추기 위해 공사가 무리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 현장의 인근 주민은 “몇 달 전부터 새벽 5~6시께부터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며 “큰 소음이 나는 공사는 대체로 낮에 진행되지만 밤에도 내부에서 공사가 진행되면서 소음이 들려 불편하다”고 전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소음진동관리법 22조 위반을 이유로 의왕시청으로부터 과태료도 부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준공 지연 현장이 늘어나면서 전문가들은 시공사의 책임준공에 대한 의무를 다소 유연하게 조정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무리한 공사가 품질저하나 안전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시공사의 자체적인 사유가 아니라 외부적인 사유로 인해 공기가 지연되는 경우 등에 한정해 예외를 두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최명기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단 교수는 “준공 지연으로 인한 지체상금 지급 등을 우려해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하는 현장에서 안전사고나 품질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특히 감리가 없는 밤 시간대에 공사가 이뤄지는 경우 작업 중지 등이 이뤄질 수 없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많은 현장에서 입주 2~3개월 전부터 돌관공사를 진행하는데 이런 경우 하자가 특히 많이 발생한다”며 “시공사의 공기 지연 사유에 따라 책임준공 확약 등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방식을 취하면 오히려 부실한 공사를 막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부도 이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최근 간담회에서 “현재 이슈화되고 있는 부동산 PF에 대해 다양한 지원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과도한 책임 준공 의무와 수수료 등 금융 업계의 불합리한 관행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