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제가 반장이 된다면…”

박태준 서울경제TV 보도본부장
엄창록·로저 스톤으로 상징 되는
마타도어 판치는 현실의 선거판
정치의 본질·선거의 의미는 퇴색
요란함 그 이후, 대한민국의 삶은


대한민국의 한 초등학교 5학년 교실. 반장 선출을 위한 투표와 개표가 막 끝났다. 후보자는 모두 3명. ‘인싸(인사이더, 인기가 많은 사람)’인 동시에 일진이기도 한 유장원, 엔터테인먼트사 연습생으로 인기 좋은 주선영, 그리고 입후보 자체가 의외였던 존재감 제로의 정인호. 결과는 ‘유장원 11표, 주선영 10표. 정인호 6표’


장원과 선영 지지자들의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 꼴찌 인호가 조용히 웃음을 삼킨다. 조작된 승부. 장원의 협박 섞인 제안을 받은 인호가 담임선생님의 검인 도장까지 훔쳐 만든 투표용지로 투표함을 교묘히 바꿔치기 해 얻은 결과였다.


2021년 왓챠가 공개한 단편 영화 ‘반장선거’는 배우 박정민의 첫 연출작으로, 초등학교 누아르물로 불릴 만큼 차가운 분위기의 연출과 흥미로운 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오래 전부터 초등학교 반장선거에는 기성 정치판이 투영됐다.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의 정치와 선거는 그렇게 영화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권모와 술수로 넘쳐 난다.


국내에서는 ‘선거판의 여우’라 불렸던 엄창록이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참모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1967년 국회의원 선거 때 공화당 운동원 복장을 한 사람들이 양담배를 물고 주변의 시민들에게는 싸구려 담배를 선물하거나, 짝짝이 고무신을 돌린 것은 그저 미담에 불과하다. 확인된 바는 없으나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 사흘을 앞두고 느닷없이 경상도 전역에 뿌려진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는 찌라시가 그의 전략이었음을 이제는 모두가 짐작한다. (김대중 캠프에 있던 그는 투표 열흘 전 실종됐다가 선거가 끝나 후 한 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전에는 없었던 영·호남 지역 감정의 최초 설계자가 엄창록이었다는 얘기다. 2022년 이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킹메이커’에는 그를 묘사하는 대사가 나온다. “아~ 이길라고 덤벼블문, 지 부모 위패도 팔아먹을 양반이라.”


미국에는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당선시킨 로저 스톤이 있다. 그는 정치와 선거를 비즈니스 혹은 쇼로 바라본다. 따라서 마타도어는 승리를 위해 장착해야 할 필수 아이템이다. 다큐멘터리 ‘겟 미 로저 스톤’ (넷플릭스, 2017)에서 그는 당당히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권자들이 오락과 정치를 구분할 것 같아요? 정치는 추잡한 사람들을 위한 쇼비즈니스예요.”


1988년부터 트럼프에게 대선 출마를 권유했던 스톤(당시 자신은 경주마를 찾는 기수였다고 회고한다.)에게 트럼프의 당선은 킹메이커를 자임하는 그의 최고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힐러리를 가둬라(Lock Her Up)’ 캠페인을 주도한 그는 자신의 전략을 ‘스톤 법칙’이라고 소개한다. “정치에서 잘못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지루한 것이고, 증오는 사랑보다 더 강한 동기”라는 평소 지론을 입증한 셈이다.


선거의 계절이다.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총선의 뜨거운 열기가 모든 뉴스를 압도하고 있다. 온갖 변수와 계략, 배신과 야합이 ‘카더라’로 전해져 밥상 위 대화를 채우고 술자리의 안주를 대신한다.


국민만 바라보겠다는 그들의 입에서 시작된 나쁜 뉴스와 거짓 뉴스가 난무하는 사이 도대체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유권자에게 선거의 의미가 무엇인지 흐릿해 진다. 우리는 누구를, 어떤 이유로 뽑아야 하는 걸까.


그날 ‘반장선거’에서 들러리 후보인 동시에 부정 선거의 ‘실무’를 맡았던 인호는 자신의 유세 차례가 되자 소심한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 한다. “제가..반장이 된다면..어..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반 아이들이 모두 떠난 교실. 인호는 탁상에 숨겨 놓았던 진짜 투표함을 꺼내 확인해 본 후 묘한 표정을 짓는다. 진짜 투표에서 반장으로 당선된 사람은 바로 인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박정민 감독은 인터뷰에서 “과연 그 다음은 어떻게 됐을까가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반장선거가 끝난 이후.


요란한 현실의 선거가 끝난 이후 대한민국의 삶이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아직은 아침 공기가 차가운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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