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철·수소터빈·다중로봇…국가핵심기술 지정된다

◆국가핵심기술 4년만 정비
고속철·다중로봇 등 신규 지정
5년간 핵심기술 유출 피해 26조
해외 기술탈취 수법 갈수록 고도화
외투심사 대폭 강화 등 보완 필요

ktx. 연합뉴스

고속철, 수소터빈, 다중로봇 등이 국가핵심기술로 신규 지정된다. 주요 산업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아 경제안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의도다.


23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정부는 이 같은 내용을 뼈대로 한 국가핵심기술 지정안 변경을 추진하기로 했다.


국가핵심기술은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안보와 산업 경쟁력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큰 기술이다. 이 때문에 국가핵심기술을 해외로 수출하거나 관련 기업을 매각할 때는 산업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미중 갈등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글로벌 기술 경쟁이 극심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다. 지난해만 해도 반도체(2건)와 디스플레이(2건), 기타(1건) 등 총 5건의 핵심기술 유출이 적발된 바 있다.


산업부는 발전용 수소터빈 설계·제작 및 시험 기술도 국가핵심기술로 선정할 계획이다. 산업부의 한 관계자는 “발전용 터빈은 기술 장벽이 높아 주요국에서 수출제한 조치 등을 강화하고 있다”며 “고속철의 경우 수출이 늘고 있어 기술 유출을 방지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로봇은 지정 항목을 더 구체화한다. 다중로봇(2개 이상의 자율이동 로봇) 운영 소프트웨어(SW)와 통제 기술 등이 핵심기술로 지정될 방침이다. 반도체도 64단 이상 낸드플래시로 핵심기술 기준이 명확해진다.


지정 해제와 신규 지정을 고려한 국가핵심기술은 기존 75개에서 76개로 늘어난다. 정부가 국가핵심기술 목록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것은 2020년 이후 4년 만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와 2차전지·로봇 등 주요 부문에서 글로벌 기술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며 “기술안보 강화 차원에서 매년 한 번씩 국가핵심기술 명단을 점검할 것”이라고 말했다.




5년간 기술유출 피해 ‘26조’

정부가 2020년 이후 4년 만에 고속철과 다중로봇의 신규 지정을 포함해 국가핵심기술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것은 최근 기술 유출 사례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부와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적발된 국가핵심기술 해외 유출 사례는 33건에 달한다. 같은 기간 산업기술 유출에 따른 피해액은 약 26조 원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산업기술 유출 건수는 23건으로 최근 5년 중 최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고속철 수출이 늘며 관련 기술 유출 우려가 덩달아 커지고 있다. 국내 대표 고속철도 업체인 현대로템의 핵심 기술이 대표적이다. 현대로템은 2022년 사우디아라비아의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 ‘네옴시티’에 고속철을 공급하기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현대로템은 우크라이나 측과 전후 재건 과정에서 고속철도를 공급하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 폴란드 역시 잠재적 수출 시장이다. 산업부가 고속철 차체 설계·해석 및 제조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신규 지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고속철 수출이 증가하면 그만큼 기술 유출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며 “(수출 확대로) 기술 안보 강화 필요성이 커진 만큼 고속철 관련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지만 잠재성이 큰 기술도 있다. 산업부가 이번에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한 발전용 수소터빈의 경우 현재 개발 단계에 있지만 향후 시장성은 작지 않다는 분석이다. 국내에서는 두산에너빌리티가 2027년 상용화를 목표로 400㎿급 수소터빈을 개발하고 있다.


다중로봇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따르면 다중로봇의 일종인 협동로봇 분야 글로벌 시장은 지난해 24억 7107만 달러(약 3조 3000억 원)에서 내년 50억 8849만 달러(약 6조 8000억 원)로 2배 가까이 성장한다. 산업부가 이번 개정을 통해 단순히 로봇으로 명시된 국가핵심기술을 다중로봇으로 구체화한 것도 이런 기술 변화를 고려했다.




“외투 심사 강화해야”

전문가들은 국가핵심기술 지정은 최소한의 장치이며 경제안보를 지키기 위한 대응 전략을 더 고도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국내 기업의 해외 소재 모회사를 인수하거나 산학 공동 연구를 명목으로 국내 연구소를 설립해 첨단 기술을 빼가는 거점으로 활용하는 등 유출 수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주제네바 대사를 지낸 최석영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한국은 최근까지 외국인 투자를 늘리는 데만 집중해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외투 심사가 취약한 편”이라고 강조했다.


기술 유출범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로 꼽힌다. 대법원 사법연감을 보면 2022년 선고된 기업 영업비밀의 해외 유출에 대한 평균 형량은 약 1년 3개월에 그쳤다. 2021년에는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33건 중 무죄와 집행유예가 87% 이상을 차지했다. 최 고문은 “기술 유출의 심각성은 커지고 있지만 산업 스파이 처벌을 위한 입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처벌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정부는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국가핵심기술 유출에 대한 벌금 상한을 기존 15억 원에서 65억 원으로 높이고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는 기존 3배에서 5배로 확대하는 것이 개정안 골자다. 개정안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다음달 총선을 앞두고 국회 법안 심사가 '올스톱'된 만큼 개정안이 21대 국회 임기 내 통과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부 관계자는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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